톈안먼 시위 30주년 침묵하는 중국…"역사적 진실 은폐 불가능"

입력 2019-06-02 12:00  

톈안먼 시위 30주년 침묵하는 중국…"역사적 진실 은폐 불가능"
1989년 6월 4일 민주화 시위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 발생
희생자 유족, 진상규명·책임자 처벌 요구…정부는 '폭란'으로 규정
"中 공산당 권위 실추 우려하지만, 진실 억압하면 충격파 더 커져"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해마다 6월 4일이 다가오면 중국 내 포털사이트와 동영상 플랫폼, 소셜미디어 등 온라인 공간에서는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삼엄한 작전이 펼쳐진다.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와 연관되거나 그를 연상케 하는 단어, 사진, 영상, 노래 등이 일제히 사라진다. 이를 위해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소프트웨어인 '검열 로봇'이 눈을 부릅뜨고 온라인 상의 콘텐츠를 감시한다.
톈안먼 사태는 1989년 6월 4일 민주화와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과 시민들을 중국 정부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한 것을 이른다.
특히 올해는 톈안먼 사태 30주년이어서 중국 당국의 경계와 검열이 여느 해보다 삼엄하다.
중국 당국은 톈안먼 시위와 관련된 콘텐츠는 물론 동성애, 노동, 환경, 비정부기구(NGO) 등 모든 '민감' 콘텐츠에 대해 전방위적인 검열을 한다.
일부 사이트는 '시스템 업그레이드'라는 명목으로 아예 접근을 차단했다.
중국 내 민주화 운동가나 인권 변호사 등은 온갖 명목으로 구금하거나 강제 이주해 활동 자체를 원천 봉쇄했다.
베이징 톈안먼광장 주변에서 과도한 경비를 펼칠 경우 오히려 톈안먼 시위를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평상시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복 경찰 등을 평소의 2배 이상으로 늘려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공산당이 이처럼 톈안먼 시위 30주년을 경계하는 것은 톈안먼 사태가 중국 현대사 최대의 치부이자 비극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홍콩에서 톈안먼 추모 촛불집회를 여는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이하 지련회)의 차이야오창(蔡耀昌) 부주석은 "인민의 군대가 민주주의와 정의를 요구하는 시민과 학생들을 군인과 탱크를 동원해 무참히 짓밟은 것은 중국 공산당이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일 것"이라고 말했다.



1989년 톈안먼 시위가 일어난 배경에는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빈부 격차가 커지고 공산당의 부패가 심각해진 1980년대 중국의 사회 상황이 있었다.
경제 개혁의 진전에 비교해 정치개혁은 이뤄지지 않아 기득권을 가진 공산당의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됐고,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소득 격차의 확대 등으로 일반 민중 사이에서 이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정치개혁을 시도한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는 1986년 발생한 학생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이듬해 실각하고 말았다.
더구나 후 전 총서기가 1989년 4월 15일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숨지자 대학생들은 후 전 총서기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고, 이는 정치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로 이어졌다.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은 5월 13일부터 톈안먼 광장에서 대규모 연좌 농성에 돌입했으며, 5월 17일에는 시위대의 규모가 10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시위가 격화하자 5월 17일 밤 중국 공산당 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당시 최고 실력자이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력진압 쪽으로 결론이 났고, 5월 20일 베이징 시내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온건파였던 자오쯔양 총서기는 실권하고 말았다.
리펑(李鵬) 총리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6월 3일 밤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시위대 해산에 나섰다.
6월 4일까지 진행된 진압 작전에서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6월 5일에는 시위대 중 한 명이 맨몸으로 탱크 앞을 막아서는 장면이 사진에 찍혔다. 그는 톈안먼 시위를 상징하는 '탱크맨'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됐다.



톈안먼 시위의 희생자 규모에 대해서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 당국은 사태 직후부터 관련 논의를 막아왔다. 증언이나 병원 기록 등에 의존해 희생자 수를 파악하다 보니 사망자 추정치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등 편차가 크다.
사고 직후인 6월 6일 중국 정부는 사망자 수가 대학생 23명을 포함해 시민과 군인 등 약 300명이라고 발표했다. 또 군경 5천여 명과 시민 2천여 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이후 6월 19일에는 베이징시가 시민 218명, 군경 23명 등 241명이 사망하고 7천여 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발표에 대한 신뢰는 그리 높지 않다. 서방 진영의 학자들을 비롯해 일부에서는 희생자 수가 수천 명에 달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톈안먼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 지도부는 상당수가 체포된 후 형을 살았으며, 일부는 해외로의 망명을 택했다.
학생 지도부 21명 가운데 수배자 1호는 왕단(王丹)이었다. 베이징대 학생이었던 그는 반혁명선동죄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7년간 복역한 후 1998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석방됐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대만 칭화대학교 인문사회학원 객원 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2017년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지난달 7일 뉴욕에서 열린 톈안먼 시위 30주년 추모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베이징사범대 학생으로 베이징지역대학연합 회장이었던 우얼카이시(吾爾開希)는 지련회의 도움으로 홍콩을 거쳐 해외로 나간 후 대만에 정착했다.
그는 정치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반공산당 논조를 펼쳤으며, 2014년과 2016년 대만 입법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중국 민주화 시위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아온 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는 주중 미국대사관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한 뒤 미국 애리조나대에서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2년 별세했다.
이들 시위 지도자의 망명에는 홍콩 시민단체와 비밀조직이 큰 역할을 했다. 지련회 등은 톈안먼 시위 이후 중국 반체제 인사 135명을 국외로 망명시켰다.
톈안먼 시위 이후 중국 지도부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강경파였던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과 군부를 동원해 강제진압의 선봉에 나섰던 양상쿤(楊尙昆)-양바이빙(楊白氷) 형제, 보수파의 대표 주자로 강경 진압을 주장한 리펑(李鵬) 전 총리 등은 이후 쭉 권력의 핵심에 머물렀다.
천윈(陳雲), 왕전(王震), 리셴녠(李先念) 등의 보수파도 탄탄한 당내 지위와 권력을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온건파로서 학생 지도부와 대화를 주장했던 자오쯔양은 1989년 5월 21일 열린 당 원로회의의 결정을 통해 총서기 직무가 정지됐다. 그는 이후 3년 동안이나 당의 조사를 받았고, 2005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의 뒤를 이어 차기 총서기로 결정된 사람은 바로 상하이시 서기로서 학생운동에 강경하게 대처했던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었다.



톈안먼 시위가 일어난 지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중국인들에게 톈안먼 시위는 '감히 거론할 수 없는 사건' 또는 '그 실상을 제대로 모르는 사건'으로 남아있다.
교사 출신인 60대 양 모 씨는 "중년 세대는 다들 그날을 기억하고 있지만 아무도 말을 꺼낼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앞으로 세월이 더 지나면 그날에 관해 이야기할 날이 올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중국 인민대에 다니는 대학생 천 모 씨는 "톈안먼 사태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지만, 솔직히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며 "현재 중국은 그때와 달리 매우 발전했기 때문에 신경 쓰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중국 내에서는 톈안먼 시위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돼 언론계나 학계, 예술계 등이 이를 공론화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가끔 중국의 민주화와 개혁을 갈망하는 예술가나 학자 등이 용기를 내어 톈안먼 시위를 언급하지만,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당국의 구금이나 가택연금 등 가혹한 탄압뿐이다.
톈안먼 시위의 희생자 유족들은 '톈안먼 어머니회'를 결성해 중국 정부에 톈안먼 시위 진상 조사, 희생자 배상, 진압 책임자 처벌 등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지만, 이들의 목소리에 중국 정부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중국 지도부는 톈안먼 시위를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규정했으며, 이러한 시각은 아직도 톈안먼 시위를 규정하는 공식 논조로 남아있다.
중국 공산당이 이처럼 톈안먼 시위를 금기시하는 것은 당의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톈안먼 시위를 재평가한다는 것은 역대 당 지도부의 잘못을 들춰내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당의 정통성과 순결성에 상처를 입혀 스스로 당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결과를 빚게 되기에 이를 꺼린다는 얘기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부친이자 당 원로였던 시중쉰(習仲勳)이 개혁 성향을 띠고 후야오방 등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시 주석이 톈안먼 시위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으나, 이러한 기대는 어긋났다.
시 주석은 되레 2012년 말 집권 후 사회 통제와 검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면서 '당의 영도'를 사회 전반에 관철하려는 정책 노선을 취해왔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영원히 톈안먼 시위의 진실을 은폐하고 이를 인민에게 숨길 수는 없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차이야오창 지련회 부주석은 "매년 수많은 사람이 해외여행을 떠나고 수십만 명의 유학생이 외국에서 공부하는 상황에서 과연 톈안먼 시위의 진실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겠느냐"며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앤드루 네이선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톈안먼 시위와 같은) 역사적 이슈를 완전히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러한 논의 자체를 억압할 때 생기는 문제는 언젠가 그 이슈가 공론화될 때 대중이 받는 충격과 체제의 정당성에 가해지는 위험이 훨씬 더 커진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ssah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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