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대백과사전 덕분에 한국 학술문화 비약적 성장"

입력 2019-06-28 06:10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덕분에 한국 학술문화 비약적 성장"
한중연 36년 생활 마무리하는 '사전 산증인' 김창겸 부단장
"열띤 토론으로 표제어 정해…콘텐츠 보강이 장기 과제"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정확히 40년 전인 1979년 9월 한민족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대통령령이 공포됐다.
이듬해 4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가 신설되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권위 있는 지식정보를 담은 백과사전 제작이 시작됐다.
1991년 12월 초판본 27권이 완간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중연을 대표하는 사업이 됐다. 5년 만에 약 7만5천 질이 팔렸고, 지금은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다음'에서도 사전 검색이 가능하다.
오는 30일자로 한중연에서 정년퇴임을 하는 김창겸(60) 한국학진흥사업단 부단장은 1983년 편수연구원으로 임용된 뒤 36년간 근무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산증인이자 마지막 편찬 요원이다. 2009년 4월부터 2018년 2월까지 한중연에서 문화콘텐츠편찬실장, 백과사전편찬실장을 지내며 사전 편찬을 이끌었다.
김 부단장은 지난 26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출간되면서 한국 학술문화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며 "드라마와 가요 한류도 이 사전에서 비롯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에서 국사학을 공부한 김 부단장은 신문에 나온 편수연구원 모집 광고를 보고 이에 응모해 필기시험과 면접을 거쳐 합격했다. 그는 당시 서술식 시험에 나온 문제가 고인돌, 동사강목과 동국통감 비교, 사대부 문화였다고 기억했다.
"사전편찬부가 만들어지기는 했는데, 처음에는 임시계약직이 많아 효율성이 높지 않았던 듯합니다. 연구원 집행부가 정규직 숫자를 늘리려고 공개 채용을 했는데, 그때 뽑힌 거예요. 연구원은 성남에 있었지만 사전편찬부는 1983년 6월에 종로구 서울시교육위원회로 사무실을 옮겼습니다."
사전편찬부가 서울을 베이스캠프로 삼은 이유는 대학교수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하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1983년에 30명 정도였던 사전편찬부 인원은 1987년 무렵에는 100여명으로 늘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본래 1985년에 37권을 낸다는 목표로 추진됐지만,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기간이 늘어났다. 또 한국학 연구 성과가 풍부하지 않은 점도 속도를 내는 데 부담이 됐다.
사전 명칭에 들어가는 '민족문화'라는 개념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는 1986년에 사전편찬부장으로 부임한 조동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에게 '민족문화 개념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내부 논의를 거쳐 민족문화 정의와 범주를 결정했다.
김 부단장은 "당시에 많은 대학이 민족문화를 내세웠지만, 민족문화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호했다"며 "돌아보면 민족문화 개념이 폐쇄적이고 국수적인 느낌도 들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김 부단장은 "다들 사천 편찬 경험이 없어서 항목, 즉 표제어를 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어려웠다"며 "중요도와 원고 분량을 고려해 대항목·중항목·소항목을 나누고, 항목체계도·지식체계도·민족문화 분류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학문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편수원들이 항목을 정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토론을 했고, 술자리에서 옥신각신하기도 했다"며 "경제학이나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 분야를 담당한 분들이 특히 힘들어했다"고 덧붙였다.
항목을 정할 때는 편수원이 추출하기도 하고 외부 용역을 통해 추천을 받기도 했다. 이후 항목별 원고 예상 분량과 저자를 정한 뒤 편집위원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항목 명칭, 집필자, 원고 매수를 확정했다. 필자는 연구 업적이 있는 교수들이 다수였다.
"원고를 써 달라고 부탁하면 대부분 '영광'이라는 반응을 보였어요. 물론 어떤 분은 자료가 없어서 못 쓰겠다는 식으로 거절하기도 했죠. 그럴 때는 선생님밖에 쓸 사람이 없다고 계속 부탁했습니다. 극소수 학자는 정부에서 하는 사업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인 만큼, 필자에 대한 대우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김 부단장은 "1983년에 200자 원고지 장당 원고료가 4천원이었고, 1985년에는 5천원이었다"며 "연구가 미진한 분야는 별도로 연구비를 지급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원고 작성을 맡은 학자는 정확하고 간결한 설명을 위해 별도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사전 원고를 바탕으로 논문이나 책을 쓴 사례도 있었다. 김 부단장이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한국학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자부하는 이유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사용된 항목 명칭은 학계의 기준점이 됐다. 예컨대 일제시대, 일제식민통치기, 왜정시대 대신 일제강점기를 항목으로 등재하면서 교과서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게 됐다고 김 부단장은 강조했다.
사전에서 고대사와 선사고고학 분야를 맡은 그는 일본 영향을 받아 한자를 조합해 만든 고고학 용어 대신 한글 용어를 항목으로 싣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마침 1980년대 중반에 고고학계에서는 용어 한글화 작업이 이뤄졌다.
김 부단장은 "과감하게 한글 고고학 용어를 싣겠다고 밀어붙였다"면서 "내외부에서 엄청난 공격을 받았지만, 이 사안을 김원룡 선생께 말씀드렸는데 별 반응이 없었다고 얘기하니 대부분 받아들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95년 보유편 제1권이 나오면서 28권으로 마무리됐다. 사전편찬부는 없어졌고, 편수원은 5명만 남았다. 1996년부터는 개정과 증보 작업을 진행했고 2001년 CD와 DVD를 발매했다. 제2차 증보 사업은 2017년 끝났다.
한중연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 경험을 바탕으로 일부 지자체와 함께 한국향토문화대전을 만들었고,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 역사와 생활사를 정리한 세계한민족문화대전을 꾸준히 출간 중이다.
김 부단장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투자하는 인력과 예산이 줄어든 데 대해 안타까운 감정을 내비쳤다.
그는 "지금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7만3천598항목, 48만2천476매 분량 원고, 사진 10만8천여 건이 수록됐다"며 "항목을 늘리고 정확성을 높이는 콘텐츠 보강이 과제"라고 말했다.
"세계화 시대에 사전에 민족문화라는 말을 쓰는 게 좋은지, 기존 글을 수정했을 때 필자는 누구로 봐야 할지 등 고민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모든 국민이 이용하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확대하고 보완해야 세계에 한국을 제대로 알리고 문화 수준도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고차원적 한류는 바로 학술 한류입니다."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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