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깥사람'처럼 살다간 초야의 문장가

입력 2019-07-02 15:46  

'세상 바깥사람'처럼 살다간 초야의 문장가
김인선 유고집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잠자리들이 사라질 때가 다가온다. 잠자리가 사라지면 내 가슴은 오랫동안 공허에 시달리고 그 끝에 겨울이 다가온다. 올해는 이 녀석이랑 황량한 계절을 통과하리라. 시속 사십팔 미터.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김인선 유고 산문집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에 실린 '민달팽이' 일부분이다.
2013년 쓴 이 글 속에서 저자는 여름 내내 기다리던 달팽이를 마트에서 산 열무에서 발견하고 반가워하고 유리그릇에 달팽이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달팽이처럼 느리게 살아가리라 다짐한다.
이 책은 특별한 사연이 담긴 글모음이다.
저자 김인선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알려진 문인도 아니고, 평생 직업으로 글을 쓴 글쟁이도 아니다.
1980년대 말 잡지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등지에서 기자로 일하며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았지만, 가세가 기울어 일찌감치 낙향한 뒤로는 클래식 음반 해설을 쓰거나 기업가들 자서전을 대필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초야에 묻혀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글재주는 탁월했다. 학창시절부터 글쓰기로 상을 받고, 온라인에 필명으로 올린 글들은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끝내 글쓰기로 이름을 알리지 못한 채 암으로 60세에 서둘러 세상을 등졌다.
이 책은 주위 사람들이 안타까움과 슬픔 속에 펴낸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다. 그를 당대 최고의 문장가, 산문 천재라고 평가하는 지인들이 사후에나마 그를 작가로 데뷔시킨 셈이다.
책을 펴낸 메디치미디어 김현종 대표는 저자의 잡지사 동료였다.
김 대표는 직장 시절 저자에 대해 "뭔지 나하고는 다른 세계를 가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그러나 저자는 형의 사업 실패에 연대보증으로 빚을 떠안아 신용불량자가 됐다. 신용불량을 풀 수 있는 시기가 왔음에도 신청하고 심사받는 게 귀찮아 방치했다.
김 대표는 "대한민국 땅덩어리 안에 살면 법을 지키고 제도를 따르고, 자기가 찾아 먹을 수 있는 권리와 혜택을 찾아 먹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귀찮아 포기하는, 세상 바깥 사람이었다"며 게으른 자유, 가난할 자유를 추구하며 느리게 살았다고 전했다.
출판사 사장이 된 김 대표는 수년 전 양주시 장흥의 농가 헛간에서 지내던 옛 동료에게 글을 써보도록 했다. 저자는 고민 끝에 응했으나 결국 마감은 지켜지지 않았고, 부고가 날아들었다.
책에 실린 글은 대부분 저자가 2005년 이후 경기도 전원마을에서 살아가면서 쓴 글이다.
사후 저자의 컴퓨터에서 발견된 산문, 그가 온라인에 남겼던 글, 출판을 계획하고 집필하던 괴담 형식의 글을 묶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와 떨어진 자연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쓴 글에서 저자는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해탈한 듯한 면모를 드러낸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포착한 삶에 대한 통찰과 해학이 묻어나는 글들은 범상치 않다. 서정적이고 소박한 이야기가 현실과 꿈,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낯설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돌변하는 반전도 일어난다.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여러 글에는 죽음, 영혼, 사후와 내세 등에 대한 상상과 묘사가 엿보인다.
죽어 있는 잠자리를 발견하고서 그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살아 있는 것 속에 있는데,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달아난다"며 "달아나지 않는 것은 죽은 것뿐이다. 나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하나도 알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지난해 마주 앉아 밤새 소주잔을 기울였다는 이의 부고를 받아들고서는 이렇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한다.
"누구는 저승이라 하고 누구는 황천이라 하고, 누구는 간 곳을 알 수 없다 하고 누구는 애당초 갈 곳이 없다고 합니다만, 나는 그런 소리들은 통 모르겠고, 그대 그리 좋아했던 그 골짜기에 달빛 가득 고이는 날, 메꽃처럼 호박넝쿨 위로 무동을 타고 올라가 그대를 찾아보려 하오."
메디치미디어. 380쪽. 1만6천원.
doubl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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