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여왕을 지킨 필립공 '굿바이'…코로나19 뚫고 작별 인사

입력 2021-04-18 03:02   수정 2021-04-18 12:49

[르포] 여왕을 지킨 필립공 '굿바이'…코로나19 뚫고 작별 인사
장례식 열린 윈저성 주변에 세계 각국 취재진과 추모객 몰려
경찰 등은 전원 마스크 착용…추모객 많아지며 거리두기 안 지켜져

(런던=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필립공을 좋아해서 인사하러 왔어요. 여왕에게 버팀목이 돼줬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부군 필립공의 장례식이 열린 17일(현지시간) 윈저성 주변엔 그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려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친구·가족들과 삼삼오오 윈저성을 찾은 이들은 모처럼 화창한 봄 날씨에 표정이 밝았고 언뜻 보면 즐거운 행사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윈저성 입구가 잘 보이는 명당은 이미 오전에 찼고 성 주변을 빙 둘러 있는 벤치에도 남은 자리가 없었다.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하는 20대 초반 클레어 씨는 연신 문밖을 기웃거렸다. 손님보다도 혹시나 유명한 사람이나 볼거리를 놓칠까 봐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 많아질 테니 일찌감치 배를 채울 거리를 사두라고 조언했다.
윈저성 입구 주변엔 미디어석은 물론이고 바깥에도 방송 카메라가 벽처럼 서 있었다.
필립공 장례식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영국에 국한되지 않아서 세계 각국의 언어가 들렸다. CNN 기자는 스페인어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윈저성에 더 가까이 접근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알리나 씨는 "영국 왕실과 필립공을 좋아했다. 꼭 와서 인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런던 근교에 사는 그는 두 아들, 어머니와 함께 왔다고 했다.

오후 3시 장례식이 가까워질수록 인구 밀도는 더 높아졌다. 유모차를 끌거나 어린아이들 손을 잡고 온 부모가 늘었고 반려견을 데려온 이들도 있었다.
런던 주변 서리에서 온 10대 소녀들이 방송 라디오 인터뷰를 하고 어린 소년이 영국 국기를 들고 뛰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포츠머스에서 휠체어를 탄 할머니, 강아지, 어린 소녀, 부부가 함께 온 가족도 있었다.

윈저에서 5대째 살고 있다는 89세의 제프 트라이씨는 "필립공을 좋아하기 때문에 애도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그는 여왕을 지키고 힘이 돼줬다"고 말했다.
이들은 "해리 왕자도 좋아하며 그가 둘째로서 항상 밀려나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된다"면서도 "이번에 관계를 회복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윈저성 주변은 왕실을 향한 영국인들의 애정에 비해선 한산한 편이었다. 금요일이었던 전날에 비하면 사람들이 많았지만, 코로나19 전의 주말과 비교한다면 조금 많은 수준일 듯 보였다.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거리두기 지침을 강조하며 집에서 TV로 장례식 중계를 시청하라고 권고한 여파다. 왕실도 장례식 참석 인원을 30명으로 제한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일 만 한 행사는 일절 하지 않았다.
영구차 행렬이 준비하면서부터 예포와 종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지만, 볼거리는 전혀 없었다. 장례식 시작에 맞춰 준비된 1분 묵념 시간도 잠시 주변이 조용해진 정도였다. 5분쯤 지나자 한 여성이 반라의 상태로 '지구를 구하라'고 외치며 길에 뛰어들어서 경찰이 진압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빵집에서 일하는 40대 여성 제니 씨는 "예상보다 사람이 많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필립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안전을 위해 집에서 지켜보라고 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윈저성 밖에 배치된 경찰들과 진행요원들도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영국 정부가 야외 마스크 착용을 강제하지 않는 상황에서 매우 이례적이었다. 영국은 하루 신규 확진자가 수만 명에 달하던 무렵에도 의사당을 경호하는 경찰들도 실외에선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다만 윈저성 주변을 찾은 일반인들은 대부분 노 마스크였다. 사람이 많아져 다닥다닥 붙어서게 되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영국은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높다고 해도 아직 하루에 2천 명 넘게 확진자가 나온다.

현장에 모인 이들이 모두 한 마음은 아니었다. 아일랜드에서 온 50대 부부는 나들이 겸 해서 구경하러 와봤다고 말했다. 필립공 장례식에 관한 의견을 묻자 "슬픈 일"이라고 답했지만, 반응이 떨떠름했다. 영국인들과는 느끼는 바가 다르냐고 묻자 부부 모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웃에 사는 한 40대 영국인은 주변 사람들이 필립공 별세에 큰 관심이 없다고 전했다. 그는 "여왕이면 몰라도"라고 덧붙였다. BBC는 필립공 소식으로 도배를 했다가 10만 건 넘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merciel@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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