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뒤 역사] 서방 외면 속 스탈린·히틀러와 싸운 핀란드

입력 2022-05-27 07:05   수정 2022-05-31 21:17

[뉴스 뒤 역사] 서방 외면 속 스탈린·히틀러와 싸운 핀란드
독립과 민주주의 지키려 소련에 굴종하는 '현실정치' 선택
세계에서 손꼽히는 복지 선진국 실현…나토 가입으로 냉전 그늘 탈피 시도

[※편집자 주 : '뉴스 뒤 역사'는 주요 국제뉴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건, 장소, 인물, 예술작품 등을 찾아 소개하는 부정기 연재물입니다.]



(파리=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은 물론 전 세계의 수많은 국가가 2차 세계대전의 전란에 휩싸였지만 소련과 두 차례, 나치 독일과 한 차례 연이어 전쟁을 벌여야 했던 핀란드만큼 지정학적 불운을 한탄했을 나라는 없을 듯하다. 제정 러시아의 일부였다 1917년 독립 후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은 끝에 들어선 핀란드 우파 정권은 소련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제2 도시이자 경제·문화의 중심이며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인 상트페테르부르크(소련시절 레닌그라드)의 지척에 서구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향하는 정부가 들어선 것은 잠재적인 안보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양국 국경과 인접한 핀란드 동남부의 산업지대, 핀란드만의 섬 등 경제와 안보에 긴요한 핀란드 땅을 핀란드가 보기에 쓸모없는 소련 땅과 교환할 것을 핀란드에 요구했다.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요구였지만 잘 되면 알짜배기 땅을 거저먹는 것이고 핀란드가 거부하면 이참에 무력으로 정복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당연히 협상은 진척되지 않았고 소련은 1939년 11월 말 자작극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경 지대의 충돌을 구실로 45만 대군을 동원해 인구 350만의 핀란드를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겨울전쟁'으로 널리 알려진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이다.



도무지 정당성을 찾기 어려운 소련의 침공은 전 세계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국제연맹은 소련의 침공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축출하기까지 했지만 종이호랑이만도 못한 국제연맹의 제재에 소련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절박해진 핀란드는 유럽 주요국들, 특히 이념적 지향이 비슷한 영국과 프랑스에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에 우호적인 국내 여론을 의식하면서도 자칫하면 무력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군수물자만 지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흔히 겨울전쟁이라고 하면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닌 소련군이 핀란드에 혼쭐난 전쟁으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전쟁에서 패한 것도, 국력에 대비한 타격이 훨씬 더 컸던 것도 핀란드였다. 물론 겨울전쟁으로 소련군의 무능이 만천하에 드러나 히틀러의 소련 침공 결정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지만 이것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고 주요 도시가 초토화한 끝에 당초 소련이 요구했던 것보다 더 많은 영토를 빼앗긴 핀란드의 아픔을 덜 수는 없었다.



절치부심하던 핀란드는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군의 소련 침공으로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겨울전쟁의 빚을 갚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독일 침공 3일 뒤 핀란드는 소련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 일명 '계속전쟁'(Continuation War)이다. 한때 명목상이나마 도움을 줬던 미국, 영국 주도의 서구 자유진영은 이제 핀란드의 적이 됐다.
전쟁 초기 독일군의 우세에 편승해 핀란드 역시 겨울전쟁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더 깊숙이 진격해 소련 영토 일부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소련의 반격으로 독일이 밀려나기 시작한 순간 계속전쟁의 결말도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독일의 패전이 확실시되던 1944년 9월 19일 핀란드가 소련 측이 제시한 종전 조건을 수용함에 따라 계속전쟁은 3년 3개월 만에 핀란드의 또 다른 패전으로 막을 내렸다. 계속전쟁의 피해는 겨울전쟁보다 더 컸다. 사망 또는 실종자는 6만3천여 명으로 겨울전쟁의 배가 훨씬 넘었고 일시적으로 되찾았던 영토를 다시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물고 전쟁 지도부는 전범으로 자국 특별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핀란드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소련과 맺은 종전 협정에 따라 핀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을 무장해제하거나 축출하는 의무를 지게 됐다. 독일군이 수세에 몰렸다고는 하지만 아직 패전까지는 한참 남은 상황이어서 핀란드는 이제 독일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주된 전투가 진행됐던 핀란드 지명을 따 '라플란드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상대적으로 덜 치열했고 소련과 벌인 두 번의 전쟁과 비교하면 인명 피해도 훨씬 적었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핀란드인들의 고통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한 세대 만에 한 번의 내전과 세 번의 큰 전쟁을 치른 핀란드는 '중립'을 표방했으나 냉전 시대를 거치며 거의 속국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소련의 영향에 휘둘리게 된다. 대통령 등 주요 공직 선거 일정을 소련과 의논하고 내각도 소련에서 받아들일 만한 사람으로 채우는 식이었다. 심지어 언론조차 자기 검열을 통해 소련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기사는 알아서 거를 정도였다.
이런 행태는 '핀란드처럼 하기' 또는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는 모멸스러운 용어로 불리기도 했지만 냉철히 생각하면 군사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이웃 나라와 두 번이나 전쟁을 벌인 끝에 간신히 주권국 지위를 유지하게 된 핀란드에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이념적으로 전혀 동질적이지 않았던 나치 독일과 손을 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에 굴종했던 것 역시 핀란드로서는 '현실 정치'였을 뿐이다.
이로써 핀란드는 2차 대전 이후 여러 나라가 소련에 의해 겪었던 불행을 피해 나갈 수 있었다. 공산화되지도 않았고 소련에 합병되지도 않았다. 두 번의 전쟁을 통해 자신이 큰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상대임을 소련과 전 세계에 보여준 한편 스스로 소련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임을 행동으로 입증한 덕에 핀란드는 더는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주요 지표에서 세계 최상위권으로 꼽히는 핀란드의 성취를 보면 최근 100년 동안의 간난신고와 굴종은 견딜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냉전시대에도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신중히 외교의 지평을 넓혀온 핀란드는 1995년 유럽연합(EU)에 가입하는 등 큰 틀에서 자본주의·시장경제 진영과 노선을 같이함을 분명히 했다.
그런 핀란드가 이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신청함으로써 안보 면에서도 옛 소련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려고 한다. 어려웠던 겨울전쟁 시절에 도와달라는 호소를 외면했고, 2차 대전 때는 적국이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와 한때 동맹이었다 적이 돼 싸웠던 독일은 모두 두 팔을 벌려 환영하고 있다.


cwhy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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