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물건은 있는데 가격이 없다?"…'연 60% 인플레' 아르헨의 일상

입력 2022-07-07 06:39   수정 2022-07-07 08:16

[르포] "물건은 있는데 가격이 없다?"…'연 60% 인플레' 아르헨의 일상
연말 물가 상승률 세 자릿수 공포감…"오늘이 가장 싸다. 오늘 사라"
경제장관 교체에 불확실성 커져…가격 책정 못한 상점들, 판매 포기


(부에노스아이레스=연합뉴스) 김선정 통신원 = "상점이 열려있으면 뭐 하나요? 살 수가 없는데……"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개인택시 기사인 라울(63)은 5일(현지시간) 뉴스를 들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마침 라디오에선 일부 상점들이 물건 가격 책정을 못 해 문을 닫았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실제로 문을 닫은 상점들을 많이 봤냐고 묻자 라울은 "가게가 열려 있으나 닫혀 있으나 가격이 없어 물건을 사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한탄했다.
'가격이 없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남미 아르헨티나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으로 신음 중이다.
연 물가 상승률이 60%를 웃도니 자고 나면 가격이 올랐다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지난 2일 마르틴 구스만 전 경제장관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경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고, 더 가파른 물가 상승을 예상한 상인들은 주말 사이 치열한 고민과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예전 가격으로 팔면 다시 재고를 채울 수도 없어 손해가 불가피하고, 올려받자니 팔리기나 할지 걱정이다. 결국 경제장관 사임 후 2∼3일간 일부 상점들이 가격 책정도, 판매도 포기해버리고 개점 휴업에 들어간 것이다.

라울은 집 수리를 위해 지난 2일 각종 물품 견적서를 받아서 4일 물건을 사러 갔는데 주말 사이 일부 물품 가격이 30% 인상됐고, 몇몇 품목은 판매가 중단됐다고 했다.
지인이 하는 동네 가게로 갔더니 지인은 "문을 닫으면 가격을 올리려고 닫았다고 안 좋은 소문이 날 수 있어 열긴 했지만 팔 수는 없으니 사정을 봐달라"고 했다.
지난 4∼5일엔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재고가 있는데 결제가 안 되는 일이 속출했다. 장관 교체의 충격이 좀 잦아든 후 6일 이후부터야 오른 가격에 정상 판매가 재개됐다.
아르헨티나의 악명높은 인플레이션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이미 1980년대 후반 라울 알폰신 정권 때 연 물가 상승률이 5천%를 넘는 '초인플레이션'을 기록했다. 이후 결국 카를로스 메넴 전 정부는 1992년 '1만 아우스트랄'을 '1페소'로 액면 절하를 하면서 '1페소 = 1달러'로 고정하는 페그제(고정환율제)를 시작했다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한동안 성공적인 정책이라 불렸지만, 아르헨티나의 고질적인 재정적자와 급격히 늘어나는 부채로 인해 경제위기가 심화했고 2002년 페그제는 폐기됐다.
이후 환율은 치솟고 물가는 다시 급상승했다.

이처럼 지난 세기 동안 여러 차례 되풀이된 물가 상승에 적응이라면 적응도 됐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부추긴 최근의 가파른 물가 상승 속에 여전히 하루하루 힘겹긴 마찬가지다.
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산층 거주지역인 레콜레타의 슈퍼마켓에서 만난 시민들도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주부 마벨(64)은 "물가가 너무 뛰어서 장보기가 무서울 정도"라며 "너무 걱정스럽다"고 했다.
요리사로 일하는 마리아(53)는 "물건을 살 때마다 어디가 더 저렴한지, 어떤 제품이 더 할인 폭이 큰지 시간을 투자해 비교해야 한다"며 "토마토 같은 야채 가격까지 매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스마트폰으로 계속 가격을 검색하면서, 정부가 제조회사와 합의해 가격을 통제하는 제품들을 주로 집어 들었다.
상인들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옷가게를 운영하는 한인 김모(56) 씨는 "1989년 초인플레도 겪고, 2001년 외환위기도 겪었지만 요즘 경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놀란다"며 "거래처에서 이미 지난주 가격을 35% 올렸다고 연락이 왔는데, 경제장관 사임 이후 오늘 가격이 또 올랐다는 연락이 왔다"고 토로했다.

그는 "겨울철 할인 기간도 곧 시작인데 그대로 가격을 올려도 되는지 다들 갈팡질팡하고 있다"며 "물건이 있어도 가격을 책정할 수 없어서 못 파는 상태"라고 말했다.
소비자들 입장에선 "오늘 가격이 제일 싸다. 오늘 사라"는 말이 진리가 됐다.
페소화 가치가 뚝뚝 떨어지니 기준금리가 연 52%라고 해도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한다. 저축보다는 소비가 더 바람직하고, 가능하다면 비공식 미국 달러를 사 모으는 게 대안이 된 지 오래다.
비교적 온건 성향이던 구스만 장관이 물러나고 좌파 여당 내 강경 진영 인사인 실비나 바타키스가 신임 경제장관으로 임명되자 불확실성이 커지며 비공식 달러 환율은 더욱 급등했다. 환율 급등은 고스란히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경제 전문가들은 올해 연말에는 물가 상승률이 최소 연 70%대에서 높게는 세 자릿수에도 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전자제품 상점에서 만난 알렉사(24)는 "가격이 오르기 전에 새 핸드폰을 사려고 했는데 이미 올라서 포기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경제난이 이어지는 고국 베네수엘라를 떠나 4년 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는 그는 "이젠 여기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며 "내년 1월에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갈 것"이라고 말했다.
sunniek8@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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