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만항재 구름바다 위에서 호젓한 하룻밤

입력 2022-09-07 08:00  

[여행honey] 만항재 구름바다 위에서 호젓한 하룻밤

(정선=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여가활동은 일상의 피로를 씻기 위한 활동이다.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즐기는 모든 행위가 크게 보면 여기 속한다.
최근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나 홀로, 또는 가족과만 여가를 즐기는 방법들이 주목받는다.
요즘 유행하는 '차박'이 그중 대표적이다.



이맘때 차박 할 때 가장 고려해야 할 일 중 하나가 기상 조건이다.
별생각 없이 계곡 근처에 차를 세웠다가는 생각지도 않았던 피해를 볼 수도 있다.
대기가 불안정한 요즘에는 더 그렇다.
이맘때 차박에서 관건인 것 중 하나는 차량 내부 온도다.
기온이 높은 곳에서는 차 내부가 거의 찜통 수준이 돼 차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노련한 캠퍼들은 고도가 높은 곳을 찾는다.
이를테면 강원도 정선의 만항재 같은 곳이다.
만항재는 정선, 태백, 영월 3개 지자체가 만나는 꼭짓점에 있다.
만항재를 넘는 414번 지방도로의 높이는 해발 1,330m. 치악산이나 북한산보다도 높다.


◇ 만항재에서 만난 카라반과 차박 행렬
일정상 태백에서 출발해야 했다.
차를 몰고 조금씩 올라가니 기온이 점점 떨어진다.
태백 시내에서는 28도였지만, 가장 높은 고개라는 만항재에 도착하니 기온이 24도까지 내려갔다.
만항재에는 야생화 쉼터가 있다.
갖가지 야생화가 피어있는 고원 위로 쉼 없이 운해가 몰려들었다 사라진다.
이곳은 산상 화원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화원에는 봄, 여름, 가을 내내 동자꽃, 자주꽃방망이, 둥근이질풀, 노루오줌, 기린초, 긴산꼬리풀 등이 피고 진다.
만항재는 운탄고도의 길목이다.
이 길목 한쪽에 카라반과 캠핑카 등 모두 20여 대가 줄지어 서 있다.
이곳에 캠핑카와 카라반들이 있는 이유는, 바로 옆이 수십m 높이의 잣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차된 20여 대의 차량은 캠핑카와 승합차, RV 등 다양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캠핑카가 있었다.
원래는 승합차로 나온 차량을 캠핑카로 개조한 것이었다.
보통 승합차보다는 약간 큰 사이즈인데다, 높이가 성인 남성이 서도 될 만큼 넉넉했다.
승합차의 뒷부분은 럭셔리하기 그지없었다.
아일랜드 식탁을 가운데 두고 'ㄷ'자 형태로 의자가 배치돼 있는데 그 한쪽은 넓어서 침대로 활용된다.
전자레인지와 냉장고도 완비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천장에 빠르게 내부 공기를 환기하는 '맥스팬'이 설치됐다는 점이었다.



이런 전자제품까지 모두 돌리려면 넉넉한 배터리가 필수다.
차량에는 1천400Å 리튬인산철 배터리가 설치됐다.
부러운 용량이다.
이 정도면 에어컨까지 넉넉하게 돌릴 수 있다.
전기 용량에 대한 설명을 듣고 천장을 다시 보니 천장형 에어컨까지 설치돼 있다.
같은 모델의 차량 여러 대가 주차된 걸 보니 일행으로 보였다.
이 차량의 주인은 60대 부부로, 퇴직한 뒤 이 캠핑카를 마련해 국내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 뼈를 때린 차박 마니아의 철학
한 승합차 옆을 지나는데 구수한 냄새가 났다.
옥수수 냄새였다.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60대 부부의 차였다.
명산과 차박 관련 네이버 밴드를 운영 중인 한씨는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여행 스토리를 게재해 온 지 수년째다.
그는 자신들의 삶을 부러워하는 댓글이 많다고 말한다.
그는 그럴 때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사는 경향이 많은데 내 경험상 그런 미래는 절대 오지 않았다'는 댓글을 단다고 한다.
그는 이어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식으로 살다 보면 자신의 일생이 흘러가 버린다"면서 "황금 같은 시간을 흘려보내면 언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부인과 함께 전국의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지금의 그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부정할 이유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조금 충격이었다.
필자도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살아온 게 아니었던가.



해발 1,330m 고지에서 차박 과정에서 생각지도 않은 깨달음을 얻은 느낌이다.
그는 며칠 전 비가 심하게 올 때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기온이 무척이나 낮아 쌀쌀했다고 했다.
부부는 갖가지 살림 도구들을 승합차 내부에 싣고 다니고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커피 그라인더였다.
원두커피를 갈아서 마시는 도구다.
커피 그라인더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사용 가능한 물품이다.
편리한 인스턴트 커피가 아니라, 원두를 볶은 뒤 이를 갈아 내려 마시는 행위 자체는 어쩌면 꽤 귀찮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에서 그는 행복을 찾는다고 한다.
차박에 대한 나쁜 인식이 많다는 필자의 말에 그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강원도 평창군 무료 캠핑장으로 주목받는 바위공원을 갔을 때 만난 젊은 공무원과의 대화를 그는 예로 들었다.
때마침 바위공원에서는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무료 캠핑객에게 음악회까지 개최하는 모습에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 공무원이 "평창에 대한 좋은 추억을 남기고 가야 앞으로 계속 평창 팬이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 서울 기온 37도, 만항재는 21도
밤이 되니 서늘했다. 준비해 간 홑겹 바람막이를 꺼내 입어야만 했다.
차량 내부 온도는 영상 21도다.
그날 서울의 최고 기온은 37도나 됐다.
아마 서울은 열대야로 많은 사람이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집에선 에어컨을 끈 채 잠을 잔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선 서늘한 기온을 걱정할 정도다.



집에서 미리 볶아온 새우볶음밥과 방울토마토 등으로 간단한 요기를 했다.
그리고는 잠잘 채비를 했다.
차량용 모기장을 꺼내 뒤편 창문에 씌웠다.
차량용 모기장은 차량 뒤 창문에 간단히 씌워 통풍을 할 수 있도록 한 필수품이다.
여름철은 그만큼 통풍이 중요하다.
여름은 이 모기장 하나만으로 부족하다.



체온 등으로 높아진 온도를 위로 배출하려면 강제 배기가 필수.
그래서 미리 캠핑용 선풍기를 활용한 자작품을 활용했다.
아크릴과 비슷한 재질인 포맥스 판으로 선풍기 틀을 만들어 고정하는 방법이었다.
캠핑카처럼 맥스 팬 설치가 불가능하니 생각해 낸 묘안이다.
온라인으로 규격에 맞게 포맥스 판을 미리 주문한 뒤 선풍기 형태로 동그랗게 배기구를 뚫었다.
그 배기구 위에 선풍기를 얹어 공기를 순환시켰다.
차량 내부에는 지난 겨울 준비해 둔 100Å 리튬인산철 배터리가 있어서 종일 선풍기를 켤 수 있다.
환기 시스템을 가동하고 매트 위에 누우니 어느새 밤이 깊어진다.
캠핑카 위로 별들이 반짝인다.
서늘해서 침낭을 덮었다.



◇ 매력적인 운탄고도
다음 날 아침에는 운탄고도를 걷기로 했다.
만항재는 운탄고도 출발점이기도 하다.
운탄고도는 1957년 함백역이 개통된 뒤 탄광에서 역까지 석탄을 실어나르기 위해 2천여 명의 국토건설단이 삽과 곡괭이 하나로 개척한 길이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 만항재에서 백운산∼화절령∼두위봉을 거쳐 함백역으로 이어지는 길로, 총 길이가 40㎞에 달한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해발 1,100m가 넘는 곳에 있는 고지와 능선을 이어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운탄고도(雲坦高道)란 이름은 발아래 구름이 양탄자처럼 깔린 풍경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이곳은 '석탄을 나르던 옛길(運炭古道)'이란 뜻으로도 불린다.
우리 삶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 석탄을 실은 '제무시'(GMC) 트럭들이 검은 먼지를 날리며 다니던 길이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얻게 됐다.
아직도 바닥이 시커먼 곳이 많다.
특히 만항재∼도롱이연못 코스(14.2km)는 운탄고도 중 가장 멋진 구간이다.



국내 최대 야생화 군락지와 백두대간의 절경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
기왕 온 김에 이 코스를 걷기로 했다.
오전 느지막이 도시락을 싸서 떠났다.
길은 널찍하고 평평하다.
길을 가다 중간중간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저 멀리 태백 시내와 정선읍 내 전경도 볼 수 있다.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는 듯한 풍경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운탄고도 중간에는 최대 민영 탄광이었던 동원탄좌가 1960년대 초 개발한 '1177 갱도'를 만날 수 있다.
목적지인 도롱이연못은 신비로운 고지대 습지다.
탄광 지하갱도가 무너져 내린 곳에 물이 차올라 생겨났다.
과거 광부 아내들이 이곳에서 지하 막장에서 일하는 남편들의 무사 귀환을 기도한 곳이다.
연못에 도롱뇽이 살아 있으면 탄광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덕분에 연못 생태환경이 과거 그대로 보존됐다.
사진을 찍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저녁나절이 다 돼 도롱이연못에 도착했다.
허겁지겁 약수를 두 손 모아 마셨다. 꿀맛이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고요한 도롱이연못에 파문이 일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9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polpor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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