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캘리포니아 드림' 어디 가고…시련의 美 서부

입력 2023-04-30 07:07  

[특파원 시선] '캘리포니아 드림' 어디 가고…시련의 美 서부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임미나 특파원 = 1995년 한국에서 개봉돼 큰 인기를 끈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홍콩 영화 '중경삼림'에서는 미국 록그룹 마마스 앤드 파파스의 1960년대 히트곡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이 주요 테마곡으로 등장한다.
홍콩 가수 겸 배우 왕페이가 연기한 영화 속 여주인공에게 캘리포니아는 팍팍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이상향으로 그려졌고, 이 영화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그 시절 이 영화에 열광했던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노래 가사는 화자가 어느 추운 겨울날 길을 걷다 캘리포니아를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내가 로스앤젤레스(LA)에 있다면 안전하고 따뜻할 텐데"(I'd be safe and warm If I was in L.A.)라는 구절이 특히 인상적이다.
필자 역시 10대 시절 이 영화와 노래를 접한 이래 캘리포니아에 대한 '환상'을 키워왔다. 하지만 지난 2월부터 캘리포니아의 대표 도시 LA에서 특파원으로 살게 되면서 이 지역의 현실을 몸소 마주하게 됐다.

무엇보다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캘리포니아의 날씨였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3월 초까지 캘리포니아에는 11차례에 걸쳐 폭우·폭설이 쏟아졌다. 한 번에 사나흘씩 이어진 폭우가 석 달간 거의 매주 닥친 것이다.
역대급 강수량 기록을 남긴 폭우·폭설로 침수를 비롯해 정전, 고립, 교통사고 등이 이어지며 인명피해가 속출했다.
기후 전문가들은 태평양에서 발원한 좁고 긴 비구름대가 미 서부에 잇달아 비를 뿌려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기의 강'(대기천·atmospheric river)으로 불리는 이 현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많이 발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LA에 정착한 지 오래된 교민들은 "여기서 수십 년 살았지만, 이렇게 혹독한 날씨는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런 이상한 날씨를 대비하지 못한 행정 당국과 주민들은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폭설로 고립된 산간 마을에 당도하기 위해 제설작업으로 길을 뚫는 데 열흘이 넘게 걸렸고, 50여년간 정비하지 않고 방치한 강의 제방이 폭우로 무너지면서 홍수 피해를 더 키우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몰려 사는 LA 카운티에서도 크고 작은 피해가 잇달았다. 특히 지은 지 50∼80년이 지난 데다 방수 설비가 거의 되지 않은 주택이 상당수여서 폭우에 취약했다.
필자 역시 LA에 도착하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누수 피해를 겪어야 했다. 197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는 내부 리모델링 공사와 페인트칠 덕에 겉으로는 깔끔해 보였지만, 입주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이틀 내내 폭우가 쏟아지자 빗물이 집 안으로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어 며칠 뒤에 또 폭우가 닥쳤고, 빗물은 거실 마룻바닥 틈새로 역류해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방 두 개 중 하나는 빗물로 바닥의 카펫이 모두 젖어 곰팡이가 피면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폭우가 이어진 3월 중순까지 주택가를 지나다니다 보면 빗물을 막으려고 지붕에 누더기처럼 군데군데 비닐 포장을 돌로 얹어놓은 집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기후 변화'가 낳은 그로테스크한 풍경이었다.

겨울과 봄에 걸쳐 석 달가량 이어진 대기천 현상은 태평양의 해수 온도 상승과 관련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수년 주기로 일어나는 엘니뇨(남미 페루 서부 열대 해상에서 수온이 평년보다 높아지는 현상)와 그 반대인 라니냐 현상이 점차 불규칙하게 나타나면서 태평양 주변 지역에 이례적인 기후 현상을 몰고 온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해까지는 캘리포니아에 3년간 가뭄이 이어져 대형 산불이 잇달아 발생하고 주요 수원지인 콜로라도강이 일부 바닥을 드러내기도 했다.
올여름에는 다시 극심한 폭염이 닥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아름다운 해변과 따사로운 햇살, 산들바람에 야자수 잎이 경쾌하게 흩날리는 풍경이 더는 캘리포니아의 일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낙원과도 같았던 캘리포니아의 이상적인 날씨가 머지않아 흘러간 팝송과 함께 그리워해야 할 추억의 대상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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