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중국 관객들도 등돌린 6·25 소재 애국주의 영화

입력 2023-10-21 07:07  

[특파원 시선] 중국 관객들도 등돌린 6·25 소재 애국주의 영화


(베이징=연합뉴스) 한종구 특파원 = 6·25 전쟁 중 중국군과 미군의 전투를 소재로 한 중국 영화 '지원군: 영웅의 습격'(志願軍:雄兵出擊)을 최근 베이징 차오양구의 한 극장에서 관람했다.
'패왕별희'로 1993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천카이거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장쯔이·탕궈창·황샤오밍 등 호화 캐스팅에 제작비로 6억 위안(약 1천100억원)을 쏟아부은 영화다.
국경절 황금연휴(9월 29일∼10월 6일)를 하루 앞두고 개봉한 이 영화는 6·25 전쟁 중 혈전으로 꼽히는 송골봉(松骨峰)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중국 전쟁사는 송골봉 전투를 1950년 11월 중국군 38군(현 82집단군) 소속 1개 중대가 미군 2사단과 맞서 승리한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로 38군은 '만세군'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중국에서 송골봉 전투는 6·25 전쟁 중 가장 비장했던 전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시진핑 국가 주석이 2018년 군부대 시찰 당시 송골봉 전투를 언급하며 "이 전투에서 매우 치열하게 싸웠고 장교와 사병들이 완강하게 맞서 싸웠다"고 말했을 정도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개봉 전부터 '최고의 걸작'이 탄생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신문망은 "피 흘리며 싸운 290만 중국 인민지원군을 기억하고 용감히 희생한 19만7천여명의 영웅적 아들·딸을 추모하는 작품"이라며 "규모, 진용, 스케일 면에서 중국 영화 역사상 드문 사례"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기자가 극장을 찾은 날,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인으로서 6·25를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움)의 승전사로 그려낸 스토리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특히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사령관 펑더화이 역의 왕옌후이가 "당신과 나는 이 시대에 태어났고, 희생은 우리가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다. 당신이 지불하지 않으면 아들과 손자가 지불해야 한다"며 중국의 참전을 정당화하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신냉전으로 불리는 미·중 갈등 국면에서 중국인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려는 게 이 영화의 진짜 목적이라는 생각이 러닝타임 140분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해서 이런 영화를 봐야 하는가'라는 자괴감까지 들었다.


중국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관영매체의 홍보와 초호화 캐스팅에도 흥행 수입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온라인 티켓 플랫폼 마오옌에 따르면 개봉 첫날 2천700만 위안, 6일간 3억8천만 위안을 기록했다.
2021년 비슷한 시기 개봉한 항미원조 영화 '장진호'가 6일간 30억 위안을 벌어들인 것에 비하면 8분의 1 수준이다.
중화권 영화계에서는 '지원군'의 흥행 실패 이유로 애국주의 영화에 대한 피로감을 꼽는다.
중국식 애국 영화는 중국인을 '슈퍼 히어로'로 묘사해 미국을 물리치거나 전 세계를 구한다는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중국인 우주비행사가 멸망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한다는 '유랑지구', 6·25 전쟁에서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와 승리했다는 '장진호' 등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6·25를 일으킨 게 북한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은 채 중국군의 활약만 일방적으로 다루는 등 영화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점도 흥행 부진으로 꼽힌다.
인터넷의 발달로 중국인들도 6·25에 대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저우샤오정 전 중국 인민대 교수는 "관중들이 '지원군'에 수긍하지 않는 이유의 핵심은 인터넷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며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과거보다는 더 많이 이해했다"고 말했다.
저우 교수는 영화 '장진호'를 거론한 뒤 "장진호 전투는 당시 중국 지도부의 무능을 보여준 것으로, 장비 부족으로 군사들이 얼어 죽었다"며 "이 전투가 영화로 만들어져 홍보에 사용되면서 민중들이 전투의 진상을 알게 됐다"고 비판했다.
홍콩 명보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았다.
관객들이 애국 구호를 외치는 주인공에게 실망하고, 항미원조 실상을 알게 된 이들이 늘어나며 흥행에 실패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만난 중국 영화계 인사는 기자에게 중국의 '검열'에 문제를 제기한 홍콩 톱스타 저우룬파(주윤발)의 부산국제영화제 발언에 영화계가 큰 충격에 빠졌다고 귀띔했다.
선전, 이념, 문화 시스템이 당의 혁신적 이론으로 당 전체를 무장시키고 인민을 교육하는 주요 정치적 임무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중국 시스템에서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저우룬파의 발언을 복기해본다.
그는 "지금은 규제가 많아 제작자들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시나리오는 영화 당국의 여러 파트를 거쳐야 하고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제작비를 마련하기도 힘들다. 많은 영화인이 애를 쓰고 있지만 검열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jkh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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