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낙태권' 다른 길 가는 미국과 유럽

입력 2024-03-05 03:04  

여성 '낙태권' 다른 길 가는 미국과 유럽
프랑스, 세계 최초 헌법 명기…미,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
유럽 주요국, 제한적 합법화 유지…확대 움직임도


(워싱턴·런던=연합뉴스) 김동현 김지연 특파원 = 프랑스가 4일(현지시간) 헌법에 낙태의 자유를 명시한 사상 첫 국가가 되면서 여성의 낙태권을 두고 서구 사회의 두 축인 미국과 유럽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됐다.
프랑스가 헌법상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낙태권까지 확대하는 동안 미국은 낙태권을 인정한 획기적 판례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을 2022년 폐기하면서 보수적 색채가 짙어지고 있다.
미국의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는 프랑스의 낙태권 헌법 수록을 추동하는 작용을 했다.
◇ 美 대법원 기념비적 판결 폐기 이후 낙태권 후퇴
미국 연방대법원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개인의 자유를 명시한 헌법 14조가 '사생활을 누릴 권리'를 보장하며 이 권리에는 여성이 낙태를 선택할 권리도 포함된다고 판단했다.
이 기념비적인 판결 이후 미국에서 임신 약 24주까지는 낙태가 헌법상의 권리로 인정됐지만, 2022년 6월 보수 우위의 연방대법원이 헌법 조항에 낙태권이 명시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이를 뒤집었다.
그 결과 낙태 허용 여부를 주(州)별로 결정하게 됐는데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 집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14개 주가 낙태를 금지했으며, 7개 주는 낙태 허용 기간을 '로 대 웨이드'에서 허용한 임신 24주보다 짧게 규정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엔 낙태를 금지한 앨라배마주에서 냉동 배아도 '사람'이라고 인정한 판결까지 나왔다.
앨라배마주 대법원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냉동 배아도 어린이이며 이를 폐기할 경우 부당한 사망에 따른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했는데 이는 난임 치료의 일종인 체외 인공수정(IVF)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주에서도 이처럼 사람의 범주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배아나 태아로까지 확대하는 판결이 나올 경우 미국 전역에서 낙태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런 상황에 미국의 여성과 진보 성향 유권자들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침해받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이 2022년 11월에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대거 투표소를 찾아 낙태권을 옹호해온 민주당에 승리를 안겼으며 오는 11월 대선에서도 낙태권을 비롯한 생식권 문제가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민주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은 연방대법원과 앨라배마주 판결을 여성의 자유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하고서 재선에 성공할 경우 낙태권을 보장하는 연방법을 제정하겠다고 공약했다.

◇ 유럽, 비교적 폭넓게 낙태권 인정…'제약 필요' 논쟁은 계속
낙태권을 헌법적 권리로 명시하기로 한 프랑스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유럽에선 임신 초기 낙태할 권리를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다. 또한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의 반작용으로 낙태권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유럽의회는 미 연방대법원 판결 직후인 2022년 7월 낙태할 권리를 유럽연합(EU) 시민의 자유·권리를 명시한 조약인 'EU 기본권 헌장'에 포함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럽의회는 구체적으로 '모든 사람은 안전하고 합법적 낙태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을 기본권 헌장 제7조에 추가,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EU 조약 개정을 위해서는 27개국 만장일치 동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몰타, 폴란드의 경우 매우 제한적으로 낙태권을 인정하고 있어 의회의 요구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크지 않다.
유럽 각국은 낙태와 관련, 저마다 법제가 다르지만, 상당수가 임신 주수 등 제약을 두더라도 비교적 폭넓게 낙태권을 인정한다.
독일은 국가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헌법에 규정했으나 폭넓은 예외 규정으로 낙태를 사실상 합법화했다.
임신중절을 집도한 의사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벌금형, 임신부는 1년 이하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하지만 '지정된 기관에서 상담을 거쳐 임신 12주 이내에 낙태하는 경우' 등에 대해서는 처벌이 면제된다. 특히 임신부는 12주가 지났더라도 22주까지는 상담을 거쳤다면 처벌받지 않는다.
바티칸시국을 끼고 있어 세계 가톨릭의 중심축인 이탈리아에서도 낙태는 합법이다.
1978년 낙태를 합법화해 임신 첫 90일 이내에 건강, 경제, 사회적 또는 가족적 이유로 낙태를 원하는 여성은 보호받고 90일이 지난 후에도 태아에게 심각한 이상이 있거나 산모의 생명이나 건강이 위험할 경우에는 '치료적' 낙태를 허용한다.
다만 법은 의사들이 종교·개인적 신념에 반하는 경우 시술을 양심적으로 거부할 선택권을 부여하는데 2017년 정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산부인과 의사의 68.4%가 '양심적 낙태 거부자'로 확인됐다.
스위스는 임신 첫 12주 내 낙태를 합법화하는 제도를 20년 넘게 운용하고 있다. 1977년부터 낙태 합법화를 둘러싼 공론화 작업을 거쳤고 2022년 6월 국민투표를 통해 합법화가 결정됐다.

영국에서는 1967년 법 개정에 따라 낙태가 24주까지 합법이지만 의사 2명이 여성의 신체·정신 건강에 위험하다고 동의하는 경우 등으로 제한된다. 또한 10주 이후에는 진료소에서 시술해야 한다.
법을 어겼을 때 실제 기소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지난해에는 임신 32주가 넘은 여성이 전화상담에서 10주 이내로 속여 낙태약을 우편으로 배달받아 먹었다는 이유로 28개월 징역형을 받으면서 논란이 됐다.
법적 허용 범위를 넘어선다고 해도 낙태를 범죄화할 것이 아니라 의료의 문제로 넘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벨기에에서는 프랑스처럼 미국 대법원판결 이후 낙태권을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된다.
벨기에는 1990년 특정 조건 하에 임신 12주 이내 낙태를 합법화했지만, 시술까지 엿새간 '필수 대기 기간'을 지켜야 하는 등 조건은 아직 까다로운 편이다.
스웨덴은 1974년 제정된 낙태법에 따라 임신 18주까지 낙태를 전면 허용하고 1973년 낙태를 합법화한 덴마크는 작년 9월 현행 임신 12주인 낙태 허용 기간을 18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유럽에서도 여전히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생명 존중'의 논리는 끝없이 충돌하고 있으며 낙태에 어느 선까지 제한을 둬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란도 여전하다.

낙태를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는 유럽 국가도 있다.
가톨릭의 영향력이 큰 폴란드는 엄격하게 낙태를 금지한다. 임신부의 생명이 위협받거나 성폭행 등 범죄로 인해 임신한 경우에만 허용된다.
낙태 시술을 거부당한 임부가 숨지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낙태 금지법 폐지 여론이 들끓어 지난해 12월 출범한 친 유럽연합(EU) 성향의 새 연립정부는 12주 이내 낙태를 전면 허용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cheror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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