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하역 후 기약 없는 대기…통항 기대감에 UAE 해역으로
"독자 행동 아닌 듯"…"보험금 받아도 손실 충당 어려워"

(서울=연합뉴스) 홍규빈 기자 = 호르무즈 해협에서 화재가 발생한 HMM 나무호가 간발의 차로 해협에 고립된 데 이어 공교로운 시점에 원인 미상의 화재가 발생하는 등 여러모로 불운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해협 봉쇄가 풀리더라도 나무호는 선체 조사, 수리 일정 등으로 한동안 상업 운항을 재개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나무호는 적재용량(DWT) 3만8천톤급의 다목적 화물선(MPV)으로 작년 9월 중국 광저우에서 진수돼 올해 초 HMM에 인도됐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선 상업 운항에서 호르무즈 해협에 갇히는 악재를 겪었다.
나무호는 지난 1월 10일부터 2월 5일까지 중국 칭다오, 펑라이, 타이창 등을 거치며 중량화물을 실은 뒤 목적지인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했다.
이후 나무호가 오만만과 페르시아만을 잇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시점이 2월 25일이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같은 달 28일 이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시점으로부터 불과 사흘 전이다. 이때부터 나무호는 호르무즈 해협에 발이 묶였다.
나무호는 3월 18일까지 중국에서 가져온 화물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담만 항구에 내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약 3주간의 하역 작업 기간에도 호르무즈 해협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해협을 지나려는 민간 선박들의 피격 사례가 잇따랐고 이란이 기뢰를 설치한다는 징후도 포착됐다.
이에 나무호는 선적 화물을 모두 내린 이후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인근 해역에 닻을 내리고 기약 없는 기다림에 들어갔다. 원래라면 다시 중국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던 중 미국과 이란 간 종전 협상이 시작되면서 4월부터 호르무즈 해협 통항 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페르시아만에 고립된 많은 선박이 조금이라도 해협과 가까운 아랍에미리트(UAE) 인근 해역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무호도 4월 30일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인근에서 UAE 움알쿠와인 인근 해역으로 정박 위치를 옮겼다.
앞서 몰타 선적 유조선 오데사호는 4월 중순 미국과 이란이 휴전하면서 호르무즈 해협이 잠시 개방된 틈을 타 발 빠르게 외해로 빠져나온 바 있다.
그러나 나무호와 오데사호의 결말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나무호는 UAE 인근 해역으로 이동한 지 나흘 만인 이달 4일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했다.
사고 당시 주변 선박에서도 들릴 만큼 큰 폭발음이 있었고 인근에 있는 HMM 다온호를 비롯한 다른 선박에 퇴선이 필요하다는 무전이 전해지기도 했다.
화재 원인이 이란의 공격을 포함한 외부 요인인지, 아니면 선박 결함을 포함한 내부 요인인지와 관계없이 나무호로서는 뜻하지 않은 악재가 겹친 셈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나무호가 혼자 행동하다가 이란의 공격을 당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지만, 당시 현장 상황을 고려하면 나무호가 단독으로 움직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와 학계의 설명이다.
HMM 관계자는 "이번 화재가 발생했을 당시 나무호 인근에는 다른 선박들도 다수 정박해있었다"면서 "게다가 나무호는 4월 30일부터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서 정박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해상법 전문가인 김인현 고려대 명예교수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할 가능성이 커질 때 선박 묘박지를 해협 인근으로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나무호가 독자적으로 행동했다고 말할 수 없다"면서 "해협이 열렸을 때 빨리 출발하기 위한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말했다.

지난 8일 화재 원인 조사가 시작된 가운데 이번 악재의 여파는 상당 기간 이어질 전망이다.
호르무즈 해협 고립으로 이미 손실이 매일 쌓여가고 있었는데 선박 조사와 수리 일정까지 겹치면서 상업 운항 재개가 더 늦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해운협회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에 고립된 한국 선사들은 3월 말 기준 전쟁보험료, 유류비, 선원비 등을 추가로 지출하며 하루 약 4억9천만원의 손실을 보고 있다.
기존의 운항 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신규 운송을 하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기회비용도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호는 전쟁보험 특약을 통해 전손 시 최대 1천억원의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지만, 구체적인 보상액은 화재 원인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HMM 관계자는 "보험 보상액을 받더라도 호르무즈 고립과 운항 차질에 따른 비용을 모두 충당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bing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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