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사랑, 그 애틋함과 믿음이란 환상

입력 2013-03-08 17:01   수정 2013-03-08 21:35

사랑은 결핍이 만들어낸 상상력
기꺼이 구속당하는 불멸의 믿음
어릴적 '그녀'의 그 목소리 그리워

박형준 시인 agbai@naver.com



내게 사랑이 여전히 애틋하게 생각되는 건 다행한 일이다. 세상이 아무리 빨리 변해도 내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게 내게는 희망이고 미래다. 그리고 남들에게는 별것 아닌 것일망정 그것이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된다는 것에 감사한다. 사랑에 대한 기억 중에서 내게 첫사랑의 기억은 정말 별것 아니어서 별것이 된 것으로 남아 있다.

나는 어려서 도시로 전학을 가서 학교를 도시에서 다녔다. 방학이 되면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으로 기억된다. 윗집에 살던 동갑인 그녀가 매일 아침 우리 집으로 와서 물을 길어 갔다. 그녀의 집에도 펌프가 있고 우리집 물맛이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닐 텐데, 그녀는 아침마다 우리 집에 와서 펌프물을 양동이에 담아 갔다. 눈 많이 내린 아침에 내 잠의 이마를 밟고 윗집에서 우리 집으로 물을 길으러 오던 그녀. 아직도 잠에 빠진 나를 깨우듯 문풍지가 바람에 떨릴 때마다 창호지 문을 향해 “워매, 참말로 추운 거” 한마디를 던지곤 했다. 그 말이 잠결에도 내 가슴을 흔들었을까. 김동환의 ‘북청 물장수’의 한 대목처럼 그녀는 새벽마다 고요히 내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 퍼붓고는 내 마음을 흔들어버렸던 것이다. 아침마다 윗집에 살던 그녀가 양동이에 물 붓는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나던 나는 겨울방학 내내 그녀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여자에게 접근하는 법을 몰랐고 그야말로 안에서 샘솟는 사랑의 감정 그 자체만을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녀는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고, 설령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 거는 나 같은 쑥맥은 결국은 별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만은 지금까지 남아서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 애틋한 것이다. 그 애틋함과 환상은 나를 지켜주는 어떤 믿음을 내 생에 마련해주었다.

사랑은 타자를 자기화하는 것이다. 즉 너의 얼굴에서 나를 본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상대를 자기처럼 생각하고 자기처럼 대한다. 그것은 위태롭지만 절대적인 믿음에 기반해 있는 세계다. 사랑에 흠뻑 빠지면 이런 믿음이 극도로 강해져서 사랑하는 대상은 우아해지지만, 그 대상에게 바쳐질 믿음이 고갈되면 그저 끔찍해질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끔찍함이 상대방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믿음을 상실한 ‘나’라는 주체에게 나타나 보이는 양상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사랑은 믿음이 만들어낸 환상물일 따름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환상,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결핍이 만들어낸 거대한 상상력이다. 우리는 그 상상력으로 우리의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는 불멸의 믿음을 창조하고 기꺼이 거기에 구속당한다. 그래서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심지어 상상력의 범위 안에. 심지어 내면 이미지의 형태 속에.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죽은 자를 사랑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것은 사랑을 규정하는 것이 현재 여기 있음을 넘어서는 애착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가 아닌 한 육체와 매일 함께 있고자 하는 욕구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꼭 성적 흥분이나 성적 욕구만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자연이라든지 인간의 내면에 기초한 믿음이나 애착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좋은 차와 좋은 집과 좋은 직업, 그리고 잘생긴 외모를 사랑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 같다. 그런 사회에서 사랑과 성(性)을 대하는 태도가 왜곡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인 것도 같다. 사랑도 상품이 된 사회에서 사랑의 원초성인 애틋함이나 믿음, 애착의 가능성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그 겨울방학 내내 아침마다 우리 집에서 물 긷던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간에 대한 목마름에 냉수를 끼얹어줄 겨울 들녘 갈대 같은 그 목소리, 우리 시대의 사랑이 잃어버린 그리운 목소리가 아닐까.

박형준 시인 agba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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