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전사 → 그림자 내조 → 국민가수…시대따라 바뀐 '제1부인'

입력 2013-03-29 16:44   수정 2013-03-30 00:54

글로벌 이슈 따라잡기 - 중국의 퍼스트레이디…그녀들의 삶 되짚어보니

쑨원·마오쩌둥의 부인
쑹칭링, 항일단체 이끈 여걸…장칭, 권력 휘두르다 몰락

덩샤오핑·장쩌민의 아내
사생활 베일 속에 가려져

시진핑의 여인 펑리위안
팬클럽도 생겨…이미지 개선




“중국 외교에 새 얼굴이 등장했다.”

지난 14일 취임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에 대해 싱가포르 중문 일간지 연합조보가 전한 평가다. 지난 22~23일 시 주석이 펑리위안과 함께 첫 해외 방문국으로 러시아를 찾은 것을 기점으로 펑리위안도 중국 퍼스트레이디로서 국제 외교무대에 데뷔했다는 것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펑리위안의 옷, 화장과 헤어 스타일, 강연 등 일거수일투족이 연일 화제다. 인터넷에는 5개의 ‘펑리위안 팬클럽’이 등장했다.

○국모로 추앙받는 ‘중국의 잔다르크’

1970년대 중반 이래 중국 최고 권력자의 아내들은 대부분 철저히 몸을 숨긴 채 공개 활동을 자제해 왔다. 펑리위안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까닭이다. ‘제1부인(第一夫人·퍼스트레이디의 중국식 표현)’으로 불리는 중국 퍼스트레이디들을 되짚어 보면 중국 현대사의 명암을 읽을 수 있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제1부인 칭호를 얻은 인물은 쑹칭링(宋慶齡)이다. ‘중국의 잔다르크’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그는 1911년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의 두 번째 부인이다. 장제스 대만 초대 총통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그의 친동생이다.

상하이 부호 쑹자수의 둘째딸이었던 쑹칭링은 미국 웨슬리대로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이었다. 1915년 부모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보다 스물여섯 살 많은 이혼남이자 세 자녀까지 둔 쑨원과 결혼했다.

민족주의자 쑹칭링은 1938년 항일단체 ‘보위중국동맹’을 결성해 화교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으고,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당시 중국의 실상을 서방 국가에 알렸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분열했을 때는 항일전쟁에 적극적이었던 공산당 편에 섰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국가부주석 자리에 올랐으며, 이후 명예 국가주석으로 추대됐다. 중국 농촌 곳곳을 돌면서 여권 신장 운동과 빈민구제 활동을 벌였다. ‘중국의 어머니’로 불리며 존경받고 있다.

○권력욕과 질투로 몰락하다

중국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퍼스트레이디가 권력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마오쩌둥 중국 초대 국가주석의 아내 장칭(江靑)이 그랬다.

연극배우 출신인 장칭은 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이었다. 1939년 마오쩌둥과 결혼할 당시 공산당에서는 그들의 결혼을 반대했다. 마오쩌둥의 세 번째 부인인 허쯔전(賀子珍)이 당에서 혁명전사로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그런 허쯔전을 버리고 장칭과 재혼했다. 공산당은 “장칭은 앞으로 30년간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고 둘의 결혼을 받아들였다.

장칭은 결혼 당시의 약속을 어기고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 마오쩌둥이 1인 독재체제를 노리고 일으킨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남편을 대신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악명을 떨쳤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한 달 만에 체포돼 수감됐고, 1981년 사형선고를 받았다. 2년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1991년 옥중 자살했다.

○인민재판대에 내몰린 제1부인

류샤오치 2대 국가주석의 여섯 번째 부인인 왕광메이(王光美)는 비운의 퍼스트레이디였다. 그는 베이징 푸런대에서 중국 여성 최초로 핵물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던 엘리트였다. 1959년 남편이 국가주석에 오른 뒤 해외 방문 때마다 항상 동행했다. 중국 전통의상 치파오를 입고 세련된 패션 감각을 선보였다. 유창한 영어로 남편의 외교활동을 도우면서 ‘치파오 외교’라는 찬사를 받았다.

1967년 류샤오치가 마오쩌둥에 의해 실각하면서 왕광메이의 시련이 시작됐다. 그를 질투했던 장칭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을 시켜 왕광메이를 류샤오치와 함께 10만명 군중 앞에서 세 차례 인민재판을 받도록 했다. 홍위병들은 왕광메이에게 강제로 치파오를 입히고 하이힐을 신겼다. 탁구공으로 만든 목걸이를 그에게 걸었다. 왕광메이는 자아비판대의 나무막대에 묶인 채 구타를 당하며 ‘미국 간첩’, ‘괴상한 복장으로 세계를 싸돌아 다녔다’는 욕설을 들었다. 이후 그는 12년간 투옥 생활을 했다.

○자신을 숨기고 남편을 지키다

장칭의 전횡에 염증을 느낀 중국 정부와 국민들은 최고지도자의 부인이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이를 계기로 198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는 제1부인의 존재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 시기 제1부인들의 삶은 ‘도광(韜光·빛을 숨김)’과 ‘화평(和平·평화를 추구)’으로 대변된다. 당시 중국의 대외 정책이었던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가리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와 화평굴기(和平堀起·평화롭게 우뚝 선다)에서 따온 말이다. 1980~1990년대 최고실권자였던 덩샤오핑의 부인 줘린(卓琳)과 5대 국가주석 장쩌민의 아내 왕예핑(王冶坪), 6대 국가주석 후진타오의 아내 류융칭(劉永淸)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인적사항과 사생활은 바이두와 시나닷컴 등 중국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도 제대로 검색이 안 될 정도로 철저히 가려져 있다. 줘린은 1938년에 열다섯 살 많은 덩샤오핑의 세 번째 부인이 됐다는 것, 왕예핑은 상하이외국어대를 졸업했다는 것 빼고는 공개된 이력이 없다. 류융칭도 후진타오의 칭화대 동문으로만 알려져 있다.

○인민해방군 가수 출신 펑리위안

시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은 인민해방군 가무단 소속 유명 가수이자 현역 소장(한국의 준장 격)이다. 1987년 아홉 살 연상의 이혼남이었던 시진핑과 결혼했을 때만 해도 그의 지명도는 남편을 능가했다. 하지만 펑리위안은 “나는 언제나 남편의 뒤에 서 있다”고 말했다. 1990년 시진핑이 한 방송인과 염문설에 휩싸였을 때도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며 끝까지 감쌌다.

펑리위안은 앞으로 중국의 대외 이미지 개선과 소프트파워 강화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중국 역사학자 장리판은 “중국엔 현대적 의미의 퍼스트레이디가 사실상 없었던 만큼 펑리위안은 앞으로 중국식 퍼스트레이디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평했다. 중국 전문가인 지만수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펑리위안은 시진핑의 군부 인맥 구축과 문화산업 육성, 공공외교 강화를 위한 카드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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