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영 20년…삼성 DNA를 바꾸다] "李회장, 삼성을 암 2기에 비유…혁신없인 영원히 도태된다 강조"

입력 2013-04-08 17:57   수정 2013-04-09 03:53

'반도체 신화' 주역 이윤우 삼성전자 상임고문

신경영 핵심은 '質경영'
처음 목표는 "소니를 잡자"…외환위기 땐 죽자살자 덤벼

"나부터 변하겠다"
위로부터의 혁신 통했다…품질 DNA 심는데만 5년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삼성 메모리반도체 총괄 부사장이었던 이윤우 삼성전자 상임고문(67). 이 고문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년 전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주창하던 시절은 혁신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할 각오로 사자후를
쏟아내던 때”라고 회상했다. 또 “혁신 공부를 시킨다고 사장단 모두를 현업에서 빼자 직원들은 회사가 망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어 “덤핑으로 ‘양떼기’ 하던 경영에서 진정한 ‘질 경영’으로 돌아설 수 있었던 게 신경영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패스트 팔로어’에서 ‘퍼스트 무버’로 변하려면 20년 전처럼 선언하고 회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창조성이 꽃필 수 있도록 토양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이 왜 신경영을 선언했다고 생각하나.

“이 회장은 1993년 당시가 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여긴 것 같다. 2000년 밀레니엄 시대까지 혁신하지 않으면 영원히 도태될 것이라 봤다. 신경영 선언은 그런 위기 의식의 발로였다고 생각한다.”

▷6개월 가까이 8개 도시를 돌며 350여 시간을 토의할 필요까지 있었나.

“1993년 3월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LA)와 일본 도쿄를 순회하며 우리의 문제점에 대해 토의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경영진이 제대로 혁신을 이해하거나 가슴으로 혁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조직에 혁신 DNA가 확산되지 않았다고 봤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 100여명을 모아 혁신에 동참시키려 했다.”

▷말로는 혁신한다고 했지만 실천은 또 다른 문제인데.

“자기 자신부터 변하겠다고 했다. 위에서부터 혁신을 시작한다는 거다. 지시도 구체적이었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고 강연을 할 때마다 사자후를 쏟아냈다. 결국 혁신의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경영학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삼성전자 상황이 그렇게 심각했나.

“이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 상태를 암 2기에 비유했다. 림프선을 치료하지 않고서는 완치할 수 없다고 얘기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달라.

“1993년 당시 선진 제품과 삼성 제품을 비교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일본 소니와 샤프 도시바 제품과 삼성전자 제품을 모두 다 분해하라고 했다. 볼트 수를 서로 비교했다. 우리 제품은 왜 이렇게 볼트가 많으냐고 질타했다. 그러니 고장이 많다며 당장 바꾸자고 했다. 이런 식으로 품질에 대한 요구를 끊임없이 했다.”

▷휴대폰 화형식도 있었던 것 같은데.

“신경영 이후 1995년 삼성 휴대폰에서 불량 문제가 발생했다. 회장이 너무 화가 나 있었는지 다 태워 없애라고 했다. 모두 깜짝 놀랐다. 이후 제품에 불량이 생기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생산라인을 멈출 수 있었다. 원인을 발견할 때까지 라인 가동을 못했다.”

▷신경영의 핵심은 뭐라 생각하나.

“품질 중심이고 ‘질 경영’이다. 당시 삼성전자는 양으로 밀어붙이던 때였다. 매출이 먼저고 이익은 그 다음 문제였다. 매출을 올리기 위해 덤핑도 하곤 했다. 품질 면에서 소니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 패러다임을 바꿨다. 질을 올리지 않으면 안되고 불량은 기업에 암과 같은 존재라는 점을 인식한 계기가 됐다.”

▷바뀐 임직원들의 인식이 품질 향상으로 이어지는 데 얼마나 걸렸나.

“5년 정도 걸린 것 같다. 인식이 바뀌니 조금씩 나아졌다. 제품의 금형부터 바꿔야 한다고 해서 금형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신경영이 결정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게 외환위기라고 하는데 실제 그랬나.

“회장이 ‘위기’ ‘위기’ 했는데 잘 몰랐다. 삼성 임직원 15만명이 한꺼번에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다. 삼성전자 자산을 모두 다 팔아도 망할 수밖에 없던 때였다. 그야말로 부도 위기였다. 불필요한 조직과 자산을 정리하고 죽을 각오로 회사를 운영했다. 외환위기 이후 비로소 신경영을 제대로 실천했던 것 같다. 그래서 2000년 이후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 전엔 ‘소니 잡자’가 전부였다.”

▷이 회장이 특히 반도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신경영 1호가 반도체라고 했다. 신경영의 요체가 질 경영, 국제화, 복합화다. 1993년 당시 여기에 가장 근접했던 게 반도체였다. 그래서 반도체가 모범을 보여야 다른 것도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반도체에 유독 애착을 가진 이유가 있나.

“1974년 이병철 선대 회장에게 IBM 반도체 라인을 보여주며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자고 제안한 이가 바로 이건희 회장이었다. 선대 회장은 당시 그 라인을 보고 눈이 뒤집혀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알리는 도쿄 선언을 할 수 있었다.”

▷이 회장이 반도체 분야에서 어떤 점을 강조했나.

“일본 식으로 찔끔찔끔 투자하면 안 된다고 했다. 투자를 할 거면 한꺼번에 왕창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투자 타이밍도 중요하다고 했다는데.

“일본 사람들은 책임지지 않으려고 투자 결정이 늘 한 템포씩 늦었다. 그래선 안 된다고 했다. 어려울수록 투자를 더 하라고 했다. 그러고 안 되면 본인이 다 책임진다고 했다. 투자 타이밍에서 이겨 우리가 1993년부터 20년간 메모리반도체 1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반도체 1위를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이 있다면.

“복합화다. 일본은 생산 공장과 연구·개발 단지가 따로 있었다. 이 회장은 생산과 연구를 합치라고 했다. 연구 인력을 공장으로 발령냈다. 처음엔 연구 인력과 생산 인력이 서로 싸웠다. 하지만 서로 토의하다 보니 생산 기간이 절반으로 단축됐다. 메모리 분야에선 6개월 먼저 나오냐가 정말 중요한데 우리가 속도전에서 승리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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