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고급화·디자인…3박자 타고 동대문 부활

입력 2013-05-30 17:00   수정 2013-05-31 01:32

제조에서 판매까지 24시간…유니클로·자라보다 빨라
글로벌 브랜드서도 러브콜…젊은이·중국 큰손 발길 이어져




“블라우스 레이스는 (재봉 공장에) 들어갔지? 이 청색은 고압 염색 아냐? 저 치마는 노랑 빼고 분홍으로 가자.”

지난 29일 동대문 도매 쇼핑몰 디오트의 ‘물’ 매장. 오전 9시에 열리는 디자이너 회의에서 윤지영 사장(36)의 따발총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긴 탁자 위엔 20벌 이상의 신상품 견본이 올려져 있었다. 오늘 새로 기획한 것부터 봉제공장에 들어가 있는 것까지 하나하나 들춰보며 “밑단까지 2.95야드에 팔둘레 레이스 넣고 염색비 추가하면 단가가 9600원이니까 너무 비싸다”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디자이너들은 체크해야 할 점을 적은 주문확인서를 들고 공장으로 향했다. 아침에 기획한 옷 중 1~2개 정도는 그날 늦은 밤에 매장에 걸린다.

○2주일 vs 24시간

동대문 도매 쇼핑몰에서는 디자이너가 만든 옷이 소비자 앞에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야 하루 이틀이다. 윤원희 물 디자이너는 “아침에 기획한 옷 중 1~2개의 신상품은 밤에 매장에 나온다”며 “1주일에 적게는 5개, 많게는 10여개의 신제품을 내놓는다”고 말했다. 원부자재 공급처가 한곳에 모여 있고 봉제공장도 창신동 장위동 등 주변에 포진해 있는 ‘패션 클러스터’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니클로나 자라 같은 글로벌 제조·직매형 의류(SPA·패스트패션)업체들도 새로운 물건을 만들려면 최소 2주일에서 한 달은 걸린다. 속도 경쟁력으로는 동대문을 따라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동대문 유어스 쇼핑몰에서 도매점을 운영하는 김창경 사장은 “요즘은 물량이 늘어 작은 온라인 쇼핑몰부터 지방 소매상까지 하루에 작성하는 ‘장끼’(주문서)가 평균 200장에 달한다”며 “중국에서 재주문이 들어올 경우 물량이 몇천장이기 때문에 다른 일을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 임준원 롯데자산개발 쇼핑몰운영부문장은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자라의 회장이 동대문을 보고 하루 만에 옷이 걸리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자라의 원조는 동대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며 “기획, 생산, 제작, 판매가 동시에 빨리 이뤄지는 것이 바로 동대문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말했다.


○백화점·유명 브랜드도 ‘러브콜’

생산은 예전에도 빨랐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품질이다. 과거엔 ‘동대문 옷’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백화점이 ‘러브콜’을 보내는 것도 ‘동대문 르네상스’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두타에 ‘블루밍’ 매장을 운영하던 임서현 디자이너와 ‘밀’ 매장의 명유석 디자이너, ‘더스타일’의 이경아 디자이너는 최근 줄줄이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에 입점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4~5년 전만 해도 동대문 옷이 백화점에 매장을 내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최근 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가격 경쟁력이 있고 독특한 디자인의 동대문표 옷을 찾는 수요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싸구려’로 여겨지던 동대문 옷에 브랜드 이름만 부착하는 ‘라벨링’도 또 다른 트렌드가 되고 있다. ‘누죤’ 쇼핑몰의 한 도매상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글로벌 SPA 브랜드에서 ‘우리 옷 좀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제안이 들어왔는데 디자인 콘셉트가 우리와 맞지 않아 거절했다”며 “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유명 여성복 L브랜드, P브랜드 중엔 우리가 만든 옷에 라벨만 단 것도 많다”고 귀띔했다.

○‘두타 모델’로 소매상권도 ‘붐업’

도매뿐 아니라 소매 쇼핑몰도 다시 붐비고 있다. 저가의 중국산 의류를 들여놨던 과거 7~8년 전의 ‘암흑기’를 딛고 △자체 디자인△국산 품질△빠른 신상품 순환주기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특히 두산이 운영하는 두타는 두 차례 새단장을 통해 신인 디자이너 브랜드를 입점시키고 쇼핑공간을 넓게 바꿔 소비자를 끌기 시작했다. 매년 7억원씩 들여 개최하는 ‘두타 벤처 디자이너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한 디자이너에게 1억원의 상금과 ‘두타 무료 입점’이란 파격적인 혜택을 줬다. 문을 연 첫해인 1999년 2000개였던 점포 수를 2009년 520개로 줄이며 쇼핑공간을 넓혔다. 편리한 쇼핑 환경과 디자이너의 고급스러운 옷이 알려지면서 두타의 매출은 2010년 3315억원에서 2011년 3780억원, 지난해 4082억원으로 점점 늘고 있다.

31일 문을 여는 롯데피트인 역시 ‘두타 모델’을 벤치마킹했다. 1~2층을 동대문 디자이너 브랜드로 채운 것이다. 김종문 두타 고객팀장은 “두타가 가격 정찰제를 동대문에서 처음 시행했는데 이 덕분에 ‘동대문에서도 믿고 살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줬다”며 “현재 하루 평균 방문자 수는 1만7000명으로, 올해 매출 신장률 15%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바닥부터 승부…제2 전성기 이끄는 젊은 '동대문 패션왕'

동대문 패션타운의 키워드 중 하나는 ‘도전’이다. 정식 패션 교육을 받지 않고도 노력만으로 성공해 ‘패션왕’에 오른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30일 서울 신당동의 한 작은 사무실에서 만난 ‘리앙에스제이’ 디자이너 장기석 씨(31). 그는 대학 시절 전공은 영어다. 2007년 제일평화시장에 도매 점포를 낸 것은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장씨는 “처음에는 근처 가게에 걸린 옷을 ‘카피’하는 데서 시작해 디자인에 대한 감각을 차근차근 익혀나갔다”고 말했다. 한 유명 디자이너가 자신의 매장에서 판매한 옷으로 화보를 찍은 걸 보고 자신감을 얻은 그는 2010년 ‘인디브랜드페어’에 출전, 당선되면서 디자이너로 정식 데뷔했다.

2010년 첫선을 보인 리앙에스제이의 옷은 해외 박람회를 통해 중국, 싱가포르, 일본 편집매장에 수출되고 있다. 31일 동료 디자이너 4명과 뭉쳐 동대문 롯데피트인에 ‘오더 히어(order here)’라는 편집매장을 내는 그는 “대학에 편입해 의상디자인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실무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은 모두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부딪치며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10년째 두타에서 ‘나다나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변정윤 사장(34)은 원래 와인 소믈리에가 꿈이었다. 2001년 어느 날 새벽 우연히 동대문을 찾은 그는 “술집에서 몇십만원짜리 술병이 쌓여갈 늦은 밤에 20대 청년들이 몇천원, 몇만원 더 벌겠다고 땀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부모님을 설득해 헬로apm에서 작은 옷가게를 하나 차리긴 했지만 처음 3일 동안은 옷 한 장 못 팔았다. “이러다 아무것도 안되겠다 싶었어요. 옷가게에서 일해본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어찌나 말을 잘 하는지…. 그때부턴 정말 ‘맨땅에 헤딩’을 했죠. 장사 노하우도 익혀가고 도매상도 하나 둘씩 뚫고요.” 지금은 두타 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장사꾼’이 된 변 사장은 도매 쇼핑몰에서도 얼굴이 다 알려질 정도로 ‘선수’가 됐다. 장사가 잘될 땐 하루에 1000만원어치가 팔리기도 한다고. “디자인 전공을 하지 않은 저 같은 사람이 디자이너로 성공하긴 굉장히 어렵지만 동대문에선 디자이너이자 사장이 될 수 있었어요. 꿈이 이뤄진 거죠.”

피트인 31일 개장, 190개 브랜드 입점…이상봉·진태옥 매장도

“동대문 상권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쇼핑거리가 되는데 피트인이 앞장서야죠. 올해는 1300억원 정도 매출을 올릴 것으로 봅니다.”

김정권 롯데자산개발 대표는 30일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사거리에 있는 ‘롯데피트인’ 쇼핑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31일 오픈하는 피트인은 동대문의 합리적인 가격과 독특한 디자인, 백화점의 서비스와 쾌적한 쇼핑환경을 접목한 새로운 형태의 쇼핑몰”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특히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소속 디자이너 브랜드를 5층 전체에 입점시켰기 때문에 K패션을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1~2층엔 동대문 브랜드, 3층은 홍대, 가로수길 브랜드와 액세서리를 입점시켰고 4층엔 남성복, 지하 1층은 스포츠·신발, 지하 2층은 하이마트와 합병한 뒤 처음으로 문을 여는 ‘롯데하이마트’가 들어섰다. 지하 3층엔 해외 명품 아울렛과 미용실, 편의점, 약국, 수선실 등의 편의시설을 들여놨다. 7~8층에선 레스토랑과 푸드코트를 운영한다.

김 대표는 “백화점과 쇼핑몰을 합친 새로운 형태의 쇼핑공간으로 만들 생각”이라며 “10년 안에 1500억~20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동대문 쇼핑거리를 대표하는 쇼핑몰로 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지혜/강진규 기자 sp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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