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삭발

입력 2013-11-07 21:52   수정 2013-11-08 06:04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은 ‘여승’이란 시에서 남편 없이 어린 딸을 데리고 힘겹게 살다 딸마저 잃게 된 평안도 산골 여인의 삭발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럴 때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지는 머리카락은 한 많은 세상과의 절연을 상징한다. 애달픈 정조가 더 짙게 배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삭발이란 특별한 목적과 의미를 담아 머리를 깎는 행위다. 불가에서는 속세의 인연을 끊고 출가해 수행에 정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가톨릭에서는 평신도가 수도자나 성직자로 입문하는 의미로 삭발례를 거행했지만, 지금은 부제품의 직분을 받는 것으로 대신한다.

삭발은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 사회적 위치 변화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강압적인 박탈이나 항의, 통과의례, 새로운 결심을 반영한다. 역모에 엮인 여인들의 머리를 삭발한 왕조시대의 기록은 많다. 프랑스에서는 2차대전 때 나치군과 놀아났던 여자들을 머리 깎고 조리돌림했다. ‘마농 레스코’의 주인공 마농은 이런 봉변을 당하려는 순간 레지스탕스 청년에게 극적으로 구출됐다.

기독교 성녀 아그네스가 그리스도와의 약혼을 이유로 집정관 아들의 구혼을 거절했다가 삭발 나신으로 사창굴에 떠밀렸던 얘기도 유명하다. 서아시아와 폴리네시아 등에는 상을 당한 사람이 몸에 상처를 내거나 삭발하는 풍습이 있다. 이는 순장을 대신한 의례문화의 단면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빡빡머리 스킨헤드와 모히칸 스타일(닭벼슬 머리)이 유행하기도 했다. 영국 부두 노동자들이 머리의 이를 없애기 위해 삭발한 것에서 유래한 스킨헤드는 나중 인종주의와 국수주의로 치달았고 독일 등 유럽 전역과 미국, 호주, 러시아 등으로 확산됐다. 이들의 저항적인 태도는 펑크와 록음악에 오버랩됐고 좌우익의 정치싸움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이슈와 관련한 시위와 항의 형태의 삭발이 시시때때로 행해졌다. 울진원전 반대 시위나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하 집회에서도 단골 메뉴였다. 엊그제는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삭발 장면이 인터넷을 달궜다. 그중에서도 한 여성 의원의 모습이 가장 화제였다. 같은 여성인 당 대표는 어디 갔느냐는 놀림 또한 이어졌다. 이젠 삭발도 약발이 다한 모양이다. 워낙 흔하다 보니 희화화됐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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