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해법, 소셜투자로 찾는다] '말라리아 신음' 탄자니아에 藥 주는 대신 모기장회사 키웠더니…

입력 2013-12-04 21:09   수정 2013-12-05 03:57

(4) '물고기 잡는 법' 알려주는 어큐먼펀드의 '스마트 기부'

수백만명 목숨 구하고 일자리도 창출

저개발국 사회적기업에 투자식 기부…현지기업 육성·인도적 수혜 동시 추구
일회성 기부보다 효과 훨씬 커…13년간 80개 회사 1억1500만명 혜택



[ 뉴욕=유창재 기자 ]
30여년 전 미국 버지니아대를 막 졸업한 재클린 노보그라츠가 선택한 첫 직장은 체이스맨해튼 은행이었다. 그에게 떨어진 업무는 저개발국을 돌며 해외 대출자산의 회계감사를 하는 일이었다. 여섯살 때부터 저개발국 가난을 없애고 싶다는 꿈을 품어온 그는 희망에 부풀었다. 3년간 ‘미국 밖 세상’을 경험한 그는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는 저개발국 빈민들에게 소액 대출을 해주자”고 상사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비아냥뿐이었다. “소액 대출은 수익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더구나 가난한 사람들은 담보도 없지 않느냐. 너는 너무 순진하다”란 상사의 질책에 노보그라츠는 고개를 떨궜다. 그러곤 부와 명예가 보장된 ‘월스트리트 뱅커’ 명함을 내던졌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에서의 ‘경험’과 ‘결별’은 노보그라츠가 ‘어떻게 하면 저개발국의 가난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라는 오랜 고민을 푸는 열쇠 역할을 했다. 자선단체의 기부에 ‘투자’를 입히는 방법을 고안해 낸 계기가 됐다. 세계 첫 비영리 벤처캐피털인 어큐먼펀드는 이렇게 2001년 설립됐다.

○기부에 ‘투자’를 입히다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떠난 노보그라츠는 우간다 르완다 케냐 등 아프리카 각지를 돌며 당초 자신이 제안했던 ‘마이크로 파이낸스’(저개발국의 소기업 창업을 위한 소액대출)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한 명당 몇 달러에 불과한 소액대출로는 아프리카의 가난을 해결할 수 없었다. 기존 자선단체들도 해답이 될 수 없었다. 이들은 너무나 관료적이었고, 수혜자보다 기부자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1999~2000년엔 미국에 닷컴 버블이 한창이었다. 하루에 수십명씩 억만장자가 나왔다. 신흥 부자들은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자선사업을 찾았다. 저개발국 빈민들에게 한턱내는 ‘일회성 기부’보다는 좀더 전략적인 접근을 통해 빈민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길 원했다.

노보그라츠에게는 기회였다. 수년간 아프리카를 발로 뛰며 그가 얻은 결론 역시 ‘물, 전기, 위생 등 저개발국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순 기부가 아닌 투자’였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아프리카에도 세상을 바꾸고 싶은 창업가들이 많이 나왔다. 노보그라츠는 이들에게 세상을 바꿀 기회, 즉 자본금을 제공하면 단순 기부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큐먼펀드 뉴욕 본사에서 만난 몰리 알렉산더 인재개발부문장은 “저개발국 빈민을 위한 벤처캐피털을 만들겠다는 노보그라츠의 아이디어에 실리콘밸리 지인들이 150만달러를 내놨고, 록펠러재단과 시스코재단도 각각 500만달러와 200만달러를 기부했다”며 “이렇게 모은 850만달러가 어큐먼펀드의 종잣돈이 됐다”고 설명했다.

○효과 극대화한 ‘스마트 기부’

어큐먼펀드는 기부를 통해 투자자금을 모은다는 점에서 기존 벤처캐피털과 다르다. 이렇게 조달한 돈은 사회적 기업의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한다. 어큐먼은 이를 ‘인내자본(patient capital)’이라 부른다. 초기 단계의 사회적 기업이 자립하기까지 긴 시간 동안 투자금을 날릴 위험을 ‘인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큐먼펀드가 2004년부터 투자한 인도의 워터헬스인터내셔널(WHI) 사례를 살펴보자. 인도에선 1억7000만명이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한다. 수인성 전염병은 심각한 사회문제다. WHI는 인도의 시골 마을에 정수시스템 도입을 지원, 가난한 사람도 저렴한 가격에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로 설립됐다.

어큐먼펀드의 투자로 이 회사는 2004년 첫 정수시스템을 만들었고, 지금은 500여개 마을로 확산됐다. 덕분에 50만명이 L당 1센트에 세계보건기구(WHO)가 인증한 깨끗한 물을 마시고 있다. ‘물고기’(생수)를 주는 대신 ‘물고기 잡는 법’(정수시스템)을 알려준 셈이다.

알렉산더 인재개발부문장은 “저개발국에 기업과 산업이 일어날 수 있도록 투자하는 것이 단순 기부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임창규 한국사회투자 사무국장은 “어큐먼펀드가 초기투자금 120만달러로 생수를 사줬다면 수만명이 몇달간 깨끗한 물을 마시는 걸로 기부효과는 끝났을 것”이라며 “일회성 원조와 기부가 중심인 한국 정부 및 자선단체들도 ‘투자식 기부’를 검토할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1억1500만명의 삶을 바꾼 ‘인내자본’

어큐먼펀드가 지난 13년간 이런 방식으로 투자한 회사는 80여개. 한 회사당 25만~300만달러씩 8820만달러를 투입했다. 한 건에 수억달러씩 투자하는 영리 벤처캐피털에 비하면 적지만 ‘어큐먼의 투자는 수십배에 달하는 추가 투자를 부른다’는 점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가진다. WHI에 대한 어큐먼의 초기투자금은 120만달러에 불과했지만, 국제금융공사(IFC) 다우캐피털 등의 4000만달러 투자를 이끄는 촉매 역할을 했다. 어큐먼펀드의 혜택을 받은 ‘고객’ 수가 1억1500만명에 이르게 된 배경이다.

정부와 다국적 기업은 어큐먼펀드를 믿고 사회적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기도 한다. 탄자니아의 AtoZ 텍스타일이 대표적인 예다. 이 회사는 매년 아프리카에서 수백만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한다는 점에 주목해 그물에 살충제를 입힌 모기장을 개발했다. 어큐먼펀드는 말라리아 치료제를 주는 것보다 이 회사를 키우는 게 더 낫다고 보고 2003년 투자했다.

그러자 대기업도 움직였다. 일본 스미토모화학은 관련 기술을 로열티 없이 제공했다. 미국 엑슨모빌은 이 회사에 합성수지를 판매한 수익금을 유니세프에 기부하고, 유니세프는 다시 모기장을 사들이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AtoZ는 현재 7000여명을 고용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해 매년 2600만개의 모기장을 생산하고 있다. 덕분에 수백만명이 말라리아로부터 보호받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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