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라인홀트 메스너의 <세로 토레> / “당신은 정당한 방법으로 올랐는가?”

입력 2014-09-22 13:48   수정 2014-09-25 16:04


[김성률 기자] '등반사 시리즈 제1권'이라는 다소 거창한 타이틀이 붙은 등반서 <세로 토레>(부제 : 메스너, 수수께끼를 풀다)를 처음 만난 곳은 서점이 아니라 북한산 도선사 버스종점의 단골식당 '통나무집'에서였다. 등반을 마치고 김치찌개를 안주삼아 소주잔을 비우고 있을 때 식당 한구석 에어콘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포스터에는 다소 기괴하면서도 장엄한, 무서우면서도 무언가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봉우리의 사진이 강렬하게 다가왔는데 그 산이 바로 세로 토레였다. 포스터는 신간 <세로 토레>를 소개하는 홍보물이었던 셈이다.


<세로 토레>의 발행처를 보니 '하루재클럽'이었다. 하루재라면 등반물을 조금 먹었다는 사람이라면, 아니 북한산을 자주 찾는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고개다. 도선사 주차장을 벗어나 20~30분 정도 땀을 흘리며 올라가면 '안심바위'를 지나 나타나는 이 고개에서는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다리쉼을 하기에도 좋고 고개를 넘으면 비로소 우리나라 암벽등반의 메카인 인수봉의 자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루재클럽이라 이름붙인 이유는 아마도 하루재에서 인수봉을, 혹은 내일을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았겠거니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는 이내 <세로 토레>는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하루재클럽의 등반사시리즈 제1권 <세로 토레>를 다시 만난 것은 기자의 사무실에서였다. 하루재클럽의 변기태 대표가 직접 책을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변 대표. 그렇다면 그는 왜 산서출판사업을 시작한 것일까?


그는 "매달 5천원에서 1만원을 내는 북클럽회원을 모집하여 새로 나온 책을 제공하고 나아가 연간 약 6천여 만 원의 펀드를 모아 산서를 내는 출판사에 일정액의 자금지원을 하겠다. 그래서 다종다양한 산서들이 넘치도록 출판이 되어서 우리나라의 산악인들이 산에 대해서 더 많이 그리고 더 정확히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 때가 오면 더욱 팔리지 않는 전문산악서적을 내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저 판에 박힌 상술이 밑바탕에 깔린 인터뷰용 멘트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그는 산악인이다. 타이틀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대한산악연맹의 부회장이고 익스트림라이더의 교장이다. 사업가이기도 하며 장서만 5천여 권을 보유한 애서가이기도 하다. “팔리지 않는 전문산악서적들을 계속 만들겠다”는 다소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산악인, 그가 왜 이 책을 펴냈는가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로 토레>의 첫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1959년, ‘돌로미테의 거미’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는 체사레 마에스트리와 토니 에거는 당시만해도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남미 파타고니아의 세레 토레(3,102m)의 초등정에 나선다. 당시 그들의 장비는 16킬로그램이나 나가는 200미터의 로프, 하켄 30개, 볼트하켄 100개, 스크류하켄 30개, 나무쐐기 슬링용 30개 등 장비무게만도 25킬로그램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정상에 올랐고 토니 에거는 하산중 추락사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마에스트리의 정상 등정에 대해 의혹을 갖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이 책의 저자이자 화자(話者)인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도 포함된다. 1959년 당시 마에스트리가 사용했던 피켈은 티롤사의 스투바이(STUBAI)피켈이라는 것으로 이런 형태의 피켈로 수직의 빙벽을 오르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메스너는 1944년생으로 세계산악계에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할만큼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탈리아의 산악인이자 모험가이다. 히말라야의 8,000미터 이상 고봉 14좌를 최초로 모두 등정했고 에베레스트를 단독 무산소 등정했으며 고비사막을 홀로 건너는 등 다양한 등반을 통한 경험과 내면의 뛰어난 표현력으로 20권이나 되는 저서를 남겼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도 세레 토레에 대한 등정시비가 끊이지 않자. 1970년, 마에스트리는 이윽고 초등을 증명한다면서 기이한 방법으로 세로 토레를 등정하게 된다. 초등정 루트가 아닌 다른 루트로 그것도 4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무거운 콤프레서(Compressor/압축기)를 들고 1미터 간격으로 볼트를 박아가며 세로 토레 정상부의 빙벽 부분을 제외한 바로 밑(정상 바로 밑 버섯모양의 빙탑)에 까지 인공등반을 하고 내려온 것이다. 당시에 사용한 볼트수는 약 4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의 이른바 콤프레서 루트 등반은 또 다른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1974년 카발리에레 카시미로 페라리는 세로 토레 정상부 얼음버섯 상단의 20미터 수직빙벽을 등반하며 비로소 세로 토레의 정상에 섰다. 진정한 세로 토레 초등정자의 탄생이라고 할만한 순간이었다.


세로 토레의 높이는 해발 8000미터를 넘나드는 히말라야의 고산들에 비하자면 어린아이들 수준이지만 공기가 희박하지 않다 뿐이지 오히려 내륙의 빙원지대는 폭풍설이 더 잦아 기후상으로는 더 불리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초등이라고 여겨지는 페라리의 등반은 축하할만한 일이었다. 



1976년 짐 도니니, 존 브락, 제이 윌슨은 세레 토레 ‘정복의 안부’라고 불리는 지점에 진출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에스트리의 초등흔적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 이곳에서 하강을 하려면 분명히 확보용 하켄과 하강용 슬링이 남아있어야 했던 것이다. 마에스트리가 콤프레서 루트를 오를 때 사용했던 바로 그 콤프레서는 아직도 세로 토레 정상 벽 부근에 걸려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1959년에 마에스트리가 올랐다는 루트에서는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을까?  


마에스트리가 세레 토레를 초등정했다고 한 1959년으로부터 40년이 지난 1999년. 말레의 한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결국 마에스트리는 깜짝 놀랄만한 발언을 하게 되는데…

마에스트리는 과연 세로 토레를 올랐던 것일까? 오르지 않았다면 최소한 그들의 시등노력만은 인정해주어야 하는가?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세레 토레 등정루트가 된 ‘콤프레서 루트’는 과연 존중할만한 루트인가? 메스너는 왜 이렇게 집요하리만큼 세레 토레 초등의 진실을 파헤쳐간 것일까?


<세레 토레>는 세레 토레 초등정에 얽힌 의혹을 밝히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저변을 이루고 있는 근본적인 화두는 ‘올바른 수단으로(by fair means / 공정한 방법으로)’의 문제다.  ‘by fair means’는 등로주의를 제창한 머메리가 19세기 후반에 남긴 ‘inaccessible by fair means(그대로는 오를 수 없다)’에서 나온 말이다.


메스너는 페터 하벨러와 히말라야의 히든 피크(8068미터)에 새로운 루트를 내며 무산소로 그것도 지원팀이나 고정로프가 없이 올랐는데 그는 이러한 방식이 ‘by fair means’ 즉 공정한 수단으로 올랐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곧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산을 오르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말과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등반은 정당했는가? 매주 이어지는 등반이나 해외로 나가는 원정등반에서 우리는 항상 정당했는가? 아무도 없는 시간에 어려운 루트에 닥터링을 하지는 않았는가? 자유등반구간에서 인공등반을 하지는 않았는가? 다른 등반자의 등반을 방해하지는 않았는가? 우리의 고산등정은 언제나 공정했는가? 셀파가 깔아놓은 줄에 의지하여 오르지는 않았는가? 등반방식은 정당했는가? 등정시비에 휘말리지는 않았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올바르게 대처했는가? 네팔의 포카라에 위치한 산악박물관에 가면 에베레스트에서 수거해온 등반폐기물 즉 쓰레기들을 모아 놓은 곳이 있다. 그중에 가장 많은 것중 하나가 우리말로 쓰여진 가스통과 통조림 깡통이었다. 이제는 산악의 환경을 보존하는 일도 등반 못지않게 정당해야만 한다.


공정한 방법으로의 산악활동과 등반, 그것이 이 책 <세로 토레>가 세상에 던지는 화두이며 외침일 것이다. 산악인은, 산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슴 속에 산을 하나 품고 있다. 그것이 히말라야의 설산이든 몽블랑이든 돌로미테의 산군이든 아니면 요세미테이건 언젠가 오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산서는 역시 꿈을 갖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세로 토레’라는 산과 마음 속의 산을 묘하게 매칭시키며 울림을 주고 있다. 


오랜만에 단단하게 제본된 양장판의 책을 들고 읽자니 책과의 오랜 대화가 새롭게 시작된듯하다. 번역은 원로산악인이자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온 김영도 대산련 고문이 맡았다. 간혹 오자가 눈에 뜨이지만 재판부터는 고쳐지리라. 수록된 사진의 상태나 편집 등이 최상이라고는 말 할 수 없겠지만 이 책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 산악인의 정신을 새롭게 한다는 데에 이 책이 갖는 의미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된 하루재클럽의 등반사 시리즈가 초심을 잃지 않고 10권, 100권에 이르기까지 계속 세상을 뜨겁게 울려주기를 바라는 것이 한 독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제는 우리도 훌륭한 전문산악서적들을 넉넉히 소장할 수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많이 팔리지 않는 전문산악서적들이 서점마다 넘쳐난다면 산악인들은 또 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즐거운 일이 되겠는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 산과, 등반과, 인생과 그리고 산과 얽힌 추억들이 떠올라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이 갖고 있는 진솔함이자 묵직한 울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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