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여론에 물어보자는 문재인 대표의 정치관

입력 2015-02-16 20:47   수정 2015-02-17 06:51

깊은 밤 휘갈겨쓴 연애편지처럼…
표층 여론과 심층 여론 서로달라
인민주의는 광장의 열정에 불과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대립하는 정치체제가 서로 자신을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갖는 모호성 때문이다. 극악한 독재국가조차 민주주의 호칭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나 독일민족 사회주의라는 아름다운 이름들 말이다. 더구나 나치는 바이마르 헌법 속에서 태어났다. 헌법 전문에 김일성을 열세 번이나 호칭하면서 헌법을 주(主)기도문으로 만들어 버린 북한조차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참칭하고 있지 않나.

민주주의는 언어적으로는 국민이 주권자가 되는 정치체제다. 그러나 다양한 변용이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심지어는 군(君)을 가볍게, 민(民)을 귀하게 여겼다면서 맹자가 민주주의 사상의 원천이라는 얼빠진 주장조차 등장하는 판이다. 얼마 전엔 어떤 전교조 교사가 인민의 법정이라는 고약한 말장난까지 내놨다. 인민이라는 말을 쓰면서 민주주의를 병기하는 사례는 오개념의 가장 심각한 유형이다. 인민이라는 수식어를 내세운 이론은 그 어떤 주장을 담더라도 민주주의가 아니다. 인민 민주주의?킬링필드 문화혁명 등 피비린내 풍기는 인민독재를 지칭하는 다른 말에 불과하다. 인민주의는 필시 인민의 의지를 체화했다는 독재자를 출현시킨다. 히틀러 마오쩌둥 스탈린 차베스 등이 그런 자들이다. 인민 법정이 장성택을 처형한 북한이나 킬링필드에서의 즉결처분을 말한다는 것을 그 철없는 교사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인민이 피플(people)의 번역어라고 익살을 떨어보는 악동(惡童)조차 인민법정은 피할 것이다.

민주주의에 인민을 붙여 호칭한다면 그것은 포퓰리즘, 여론 맹종, 대중 추수, 폭력성, 급진성, 비정형성, 반제도성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그것은 광장을 점령한 군중이 집단으로 울부짖는 일련의 흥분상태를 말하는 것이어서 결코 안정된 정치 제도로 발전해 갈 수 없다. 크고 작은 소요사태와 제도 파괴 충동이 바로 대중 민주주의다. 광장 충동이라고도 부를만한 대중의 행동 습관은 그럴싸한 이유만 둘러댈 수 있으면 곧바로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광장에 뛰쳐나온다. 이는 87체제가 한국인의 행위 양식에 깊게 뿌리내린 가장 심각한 문제다.

총리 후보자 인준 문제를 놓고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제안한 여론조사는 그런 대중주의적 발상의 결과다. 여론은 기껏해야 술 취한 밤 격정에 싸여 휘갈겨 쓴 연애편지 같은 것이어서 아침이 되면 얼굴을 붉히고 찢어버리게 된다. 여론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로 제도정치의 출발점이다. 무수한 개인의 개별적 판단을 국가 이성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민주주의야말로 선거와 권력통제 등 숱한 제도화를 요구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참여’를 말했을 때, 그것은 대중의 직접통치를 의미하면서 민주주의의 심각한 퇴행을 의미?뿐이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노무현 묘소를 찾아 서민대통령을 말했다고 하지만 그는 서민이 아니라 화난 군중의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여론은 소위 전자민주주의 하에서조차 최소화되어야 마땅하다. 여론이 정책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제도의 부재요 실패의 반증이다. 문 대표의 몰이해는 ‘모든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하는 박정희 참배록 글귀에서도 드러난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가해자로 규정한다면 ‘모든 것이 대한민국’이라는 글귀는 저절로 위선과 거짓말이 되고만다. 국가 성립의 복잡성(이승만)이나 산업화가 만들어내는 사회발전(박정희)에 대한 문 대표의 너무도 단편적인 인식만을 드러낼 뿐이다.

광장의 함성이 그 자체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결락을 보완할 뿐이다. 여론 정치는 표층의 여론을 심층의 국론과 혼동하거나, 여론의 기의(記意)를 기표(記標)와 뒤섞는 어리석은 기획이다. 여론은 떠도는 것이다. “저녁에 벗어 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최인훈의 광장) 그런 민주주의는 문재인의 수첩에는 없다는 것인지.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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