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정준 벤처기업협회 회장 "퓨전요리 '미트볼 누룽지'처럼 남들이 안간 길 가는 것이 벤처"

입력 2015-04-23 21:09  

"벤처, 숫자만 늘고 체질은 허약해져…취업 못해 창업한다는 생각 버려야"

연구원에서 CEO 변신…KT 지원으로 사내벤처 시작
光통신 노하우 살려 제품 개발…16년 만에 2000억 매출 달성

벤처 3만개 시대, 질을 높여야…정부지원금 연명하는 벤처 늘어
실패해도 기회주는 '안전판' 있어야 창업은 가벼운 마음으로 해야 성공



[ 안재광/김용준 기자 ] 지난 1월 국내 벤처기업 숫자가 3만개를 넘어섰다. 2000년대 초반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진 이후 창업열기가 가장 뜨거워진 결과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창업 붐이 일고 있고, 정부도 창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런 창업열기에 대해 정준 벤처기업협회장은 “창업 열기가 좋은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며 “벤처기업 해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이 계속 나와야 이 열기가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올 2월 취임한 정 회장은 1998년 KT 연구소를 뛰쳐나와 창업, 16년 만에 매출 2000억원짜리 중견 벤처기업(쏠리드)을 일궜다. 서울 방배동 서래마을에 있는 이탈리아 퓨전 음식점 테이스팅룸에서 그를 만났다.

◆“남이 시도하지 않는 것 하는 게 벤처”

그는 이곳을 즐겨 찾는 이유부터 얘기해줬다. “음식 맛이 좋을 뿐 아니라 다른 음식점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메뉴가 있다”고 했다. 평범한 파스타나 피자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올리브 오일로 볶은 주꾸미와 함께 내오는 파스타, 오리고기와 시금치를 얹은 리조토 등을 주문했다. 포장을 해주지 않는 테이스팅룸의 영업방침도 정 회장이 이 집을 좋아하는 이유다. 독특한 메뉴를 다른 식당이 베끼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음식을 싸주는 다른 식당과는 다르다.

정 회장은 “이런 게 바로 벤처”라고 했다. 남이 시도하지 않는 새로운 사업 분야를 뚫고, 경쟁자가 모방하기 힘든 기술을 쌓고, 자기 기술을 방어하는 게 벤처기업과 닮았다는 것이다. 벤처기업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어졌다. “파이를 나눠 먹기보다 다른 파이를 한 판 더 만드는 기업을 벤처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규모와 관계없이 벤처정신이 살아있으면 벤처기업이라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문한 음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은 미트볼이 뜨거운 팬에 담겨 식탁에 놓였다. 팬의 열기에 미트볼을 싸고 있던 리코타 치즈가 토마토 소스에 녹아났다. 정 회장이 주먹만한 미트볼을 조금 떼어내 소스를 듬뿍 발랐다. 그러고선 바게트에 미트볼을 올려 권했다. “식당 선정도 그렇고 음식 먹는 법까지 준비를 많이 하셨다”고 하자 정 회장은 “첫 직장이나 다름없는 KT 연구소 입사 면접을 이 집에서 봐 나에겐 특별한 장소”라?답했다.

◆KT 사내벤처 1호 기업

정 회장은 1994년 KT 연구소에 입사했다. 1986년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 중 일본 히타치에 1년 학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객원연구원으로 가 있었다. 1993년 일이다. 정 회장은 “당시에는 일본 기업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일본에 가서 근무하는 학교 선배들도 꽤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정 회장은 광통신을 연구했다. 통신망에 들어가는 광원을 개발했다. 일본에서 일 년을 보낸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KT 연구소에 입사했다. 창조한국당 대표를 지낸 이용경 전 의원이 KT에서 연구개발본부를 맡고 있을 때였다. 이 전 의원은 정 회장의 대학 같은 과 선배이기도 하다.

정 회장이 벤처기업을 설립한 것도 이 전 의원의 영향이 컸다. 연구개발본부장에서 KT 사장으로 승진한 이 전 의원은 1998년 ‘벤처기업육성 특례 규정’이란 것을 만들었다. 직원들이 벤처기업을 하도록 적극 독려하기 위한 제도였다. 벤처 창업을 하면 자본금의 최대 20%를 회사에서 대줬다. 사업을 하다 망하면 복귀할 수 있도록 3년간 휴직도 할 수 있게 해줬다. 정 회장은 “이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부터 창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광통신 관련 제품을 직접 만들어 팔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1998년 KT에서 사내벤처제도가 만들어지자 실행에 들어갔다. 그해 11월 KT의 사내벤처 1호 기업이 됐다. 작년 매출 2000억원을 올린 통신장비업체 쏠?若?그렇게 탄생했다.

◆프로젝트 하듯 가볍게 창업할 수 있어야

오래전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라면처럼 꼬불꼬불한 면이 삼겹살과 함께 버무려진 상태로 나왔다. 정 회장은 “이 집에서 가장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음식”이라고 소개했다. 포크로 면과 고기를 함께 찍어 입에 넣었다. 기름지지 않고 담백했다.

정 회장은 “KT의 사내벤처제도가 오해 때문에 사라진 게 아쉽다”고 했다. 정 회장이 창업한 1998년부터 KT는 대규모 감원에 들어갔다. 외환위기 이후 KT 등 공기업이 핵심적인 구조조정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KT의 사내벤처 제도는 ‘구조조정을 위한 술책’이란 말까지 들어야 했다. 직원들을 내보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 회장은 “망해도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과 잘못하면 신용불량자가 되는 사람 중 누가 더 적극적으로 창업에 나설 수 있겠느냐”고 했다. “KT가 창업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안전판 역할을 해준 것은 시대를 앞서간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정 회장은 “세계에서 창업이 가장 많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한국처럼 죽기살기로 창업을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프로젝트를 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창업에 나선다는 얘기다. 정 회장도 쏠리드 창업 후 실리콘밸리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다른 회사를 창업하기도 했다. 이 회사가 잘 되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일한 연구원들은 AT&T나 시스코 등 미국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과 호떡이 나왔다. “호떡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어 드세요”하고 정 회장이 시범을 보였다. 달달하고 뜨끈한 호떡과 차가운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맛의 조화를 이뤘다.

◆“벤처로 대박나는 사람 많이 나와야”

정 회장은 “벤처기업 해서 돈 많이 버는 사람이 계속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변에 벤처 창업을 해 대박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창업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수 인재들이 교사나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곳에 더 큰 보상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라며 “사회가 사업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센티브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창업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문제점도 있다고 했다. 그는 “벤처기업은 사람이 전부인데 양질의 우수 인력이 국내에서 창업을 기피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정부에서 창업지원 자금을 주면 그 자금으로 연명하는 수준의 기업이 많은 것 같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벤처기업 숫자가 3만개를 넘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용이 좋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취직이 안 돼 창업에 나서는 게 아니라 진짜 사업하고 싶은 사람이 할 수 있도록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고도 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문제에 대한 정 회장의 해답은 벤처기업 육성이었다. 그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일부 대기업에 경제력이 쏠리다 보니 힘의 균형이 이들 기업으로 넘어가 사회적 부작용이 심각하다”며 “대기업 숫자가 지금보다 확 늘어나면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벤처기업, 중薩蓚宕湧?대기업 수준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식을 먹은 뒤 큰 잔에 담긴 커피까지 다 마셨다. 부드러운 인상에 논리적인 설명까지 어쩐지 사업가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고 하자 그는 “이런 사람이 사고 치면 크게 친다더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KT사내벤처 1호 '쏠리드' LTE 통신장비 개발

쏠리드는 정준 벤처기업협회장이 1998년 KT 연구소에 다니다 사내벤처 형태로 설립한 통신장비 업체다. SK텔레콤 KT 등 국내 통신사뿐 아니라 미국 스프린트, 일본 KDDI 등 해외 주요 통신사에도 제품을 납품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의 약 8%인 156억원을 연구개발(R&D)에 썼다. 정 회장과 함께 창업한 이승희 사장이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창업 16년 만인 지난해 처음으로 매출 2000억원을 넘었다. 영업이익은 167억원을 기록했다.


정준 회장의 단골집 테이스팅룸
주꾸미 파스타, 아이스크림과 호떡…이색 퓨전요리

서울 반포동 서래마을에 있는 양식당이다. 이탈리아 요리를 변형한 퓨전 음식을 주 메뉴로 한다. 와이지엔터테인먼트 사옥 등을 설계한 건축가 안경두 씨와 그의 아내 김주영 씨가 2009년 청담동에 처음 만든 뒤 이태원, 서래마을, 코엑스 등에 추가로 매장을 냈다. 건축가가 만든 음식점답게 인테리어가 세련됐다. 이 때문에 소개팅 장소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음식들이 대부분이다. 여러 명이 가서 하나하나 맛보는 재미가 있다. 베이컨과 시금치가 듬뿍 올라간 플랫브레드(2만1900원)와 주꾸미 스파게티(2만2900원), 직접 만든 토마토 미트볼과 리코타 치즈를 넣은 누룽지(2만4900원) 등을 많이 먹는다. 콩고물 아이스크림을 견과류가 있는 호떡에 얹어 먹는 메뉴(1만4300원)가 후식으로 인기다. 녹차 아이스크림을 직접 삶은 단팥과 함께 먹는 메뉴(1만3800원)도 많이 찾는다. 음식은 포장을 해주지 않는다. 쉬는 날은 설날과 추석 당일뿐이다. (02)532-4656

안재광/김용준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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