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사색당쟁

입력 2015-07-07 20:39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요즘 정치판을 보면서 조선시대 ‘사색당쟁’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당쟁(黨爭)이란 당파를 이뤄 싸우는 것이다. 여당은 친박·비박으로, 야당은 친노·비노로 쪼개져 싸우는 모양새가 영락없다. 양반들의 200년 당쟁은 끝내 망국으로 귀착됐다.

물론 동서고금에 정치세력 간 갈등은 어디나 있다. 신라 고려 때도 있었고 조선 전기엔 훈구파와 사림파 간 혈투도 벌어졌다. 중국에는 당나라 ‘우이(牛李)당쟁’, 송나라 신법당과 구법당, 명나라 동림파(유림)와 비동림파(환관) 등이 있다.

그럼에도 조선후기 당쟁이 유독 비판받는 것은 왜란 호란을 겪고도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권력다툼으로 날을 지샜던 탓이다. 오죽하면 TV 사극에도 당쟁과 권력암투를 빼면 남는 게 없다. 당쟁의 폐단은 무신 이덕일의 시조 ‘당쟁상심가’에 잘 묘사돼 있다. “힘써 하는 싸움이 나라 위한 싸움인가/옷밥에 묻혀 있어 할 일 없어 싸우누나/아마도 그치지 아니하니 다시 어이하리오.”

사색당쟁은 선조 8년(1575년) 사림 양반들이 이조전랑(인사담당) 자리를 놓고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진 것이 시초다. 동서 구분은 서인의 중심인물 심품袖?집이 도성 서쪽에, 동인 김효원은 동쪽에 있던 연유다. 이들의 갈등은 왜란 대비책을 놓고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았을 정도니 나라 망치는 당쟁이라 할 만하다.

동인은 정철의 처벌수위를 놓고 이산해 등 북인(강경파)과 류성룡 등 남인(온건파)으로 갈렸다. 이산해의 집이 북쪽, 류성룡은 남산 부근이어서 북인과 남인으로 불리게 됐다. 북인은 다시 대북(광해군파)과 소북(영창대군파)로 쪼개졌다. 서인은 숙종 때 경신대출척(1680년)으로 남인을 축출한 이후 처벌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했다. ‘사색(四色)’은 동인에서 갈라진 남인과 북인, 서인에서 분파한 노론과 소론을 가리킨다. 조선말 이건창의 《당의통략》에 따르면 당쟁으로 죽은 인물이 79명에 이른다.

역사학계 일각에선 당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식민사관 탓이며, 순기능도 있다는 주장을 편다. 반대파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므로 숙종 때는 백성이 오히려 살기 좋았다는 것이다. 또 탕평책은 적통이 아닌 영조가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전술이란 주장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봐도 당쟁은 양반층의 타락이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꿈꾼다는 선비들이 자신의 정파는 군자당, 반대파는 소인당으로 규정해 싸우고 또 싸웠다. 21세기 한국의 여야 대표정당들과 어찌 그리 빼닮았는지 신기할 노릇이다. 역사는 돌고도는 것인가.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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