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하우스 막걸리

입력 2015-07-10 20:45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참새가 방앗간을 거저 지나랴. 비오는 날은 파전 놓고 한 잔, 맑은 날은 오징어 무침에 한 잔…. 회사 근처에 막걸리파들이 자주 가는 곳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전국 술도가를 좌르르 꿰는 베테랑들은 큰길 건너 서대문 언덕 쪽으로 간다.

거기엔 이름난 팔도 막걸리를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술집이 있다. 처음엔 대부분 배다리막걸리로 목을 축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 청와대로 주문해 마셨다는 고양 쌀막걸리다. 알싸한 누룩맛과 청량감으로 입안을 헹군 뒤, 얼추 분위기가 익으면 나머지 막걸리들을 시음하듯 한 주전자씩 시킨다.

담백하면서도 거친 현미밥 느낌이 나는 정읍의 송명섭막걸리, 맑은 물맛을 자랑하는 양평의 지평막걸리, 은은한 솔 향기가 배어 있는 소백산막걸리, 공주의 알밤막걸리, 보리 원료에 산수유를 넣은 구례의 산수유막걸리….

진짜 술꾼들은 이 과정을 건너뛰고 부산의 금정산성막걸리로 직행한다. 신맛이 녹아 있어 좀 시큼털털하지만 혀뿌리를 감싸는 밀도감과 특유의 감칠맛이 그만이다. 상큼한 회초비빔밥 같다는 표현도 그럴 듯하다. 금정산성 일대의 곡식으로만 빚는 이 술은 산성 쌓던 일꾼들이 낮참으로 즐기던 것이다. 옛날 밀주 단속 때 업고 가던 아이는 풀어 놓고 누룩만 머리에 이고 도망갔다는 눈물겨운 역사도 녹아 있다.

이렇게 다양한 맛을 한군데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옛날엔 마을마다 작은 양조장들이 있었다. 그 많던 동네 막걸리는 다 어디로 갔을까. 1909년 주세법 공포와 1916년 주세령 시행 이후 각 가정에서 빚는 술은 거의 없어졌다. 1994년 길이 조금 열렸지만 전통주 제조 허가는 제한적이었다.

다행히 내년부터는 동네 식당에서도 막걸리를 빚어 팔 수 있을 것 같다. 수제 맥주처럼 하우스 막걸리도 허용하기로 정부가 방침을 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나 다양한 우리 술을 맛볼 수 있고 음식점도 매출을 더 올릴 수 있다. 전통주 계승과 새로운 메뉴 개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막걸리를 빚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항산화·항암물질인 스콸렌 성분이 맥주·와인보다 50~200배 많은 ‘건강 술’이 아닌가. 요즘은 머리 아픈 부작용도 없어졌다. 대여섯 살 때부터 술을 훔쳐 마셨던 변영로와 종로통을 오가며 막걸리 50여사발을 마셨던 박종화가 살아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 핑계를 대면서 우리도 막걸리 한 잔에 불콰해져 볼까나. 더구나 한가한 토요일이니.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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