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가난한 열병식

입력 2015-10-11 17:59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게 열병식”이라고 말할 만큼 열병식을 싫어했다. 열병식이 드러내는 권위주의적 모습이 마치 남부군의 상징처럼 비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권력자들은 열병식을 좋아한다. 이들은 대중을 일사불란하게 장악한다는 권력의 증좌라고 여겼다. 미국 신보수주의 정치가 어빙 크리스톨은 “대중에게 군대가 존경받도록 끌어내는 작업이 바로 열병식”이라고도 했다. 근대적 형태의 열병은 16세기 말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왕자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군대 내 반란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월급을 주는 대신 열병을 시켰다. 나폴레옹은 1806년 베를린을 점령한 뒤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성대한 열병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치와 스탈린 시대가 끝나면서 열병식은 서서히 소규모 행사로 위축돼 갔다. 프랑스는 7월14일 건국일에, 영국은 여왕 생일 때 열병식을 거행한다. 영국의 열병부대는 따로 정해져 있어서 왕실호위대가 주로 맡는다. 미국에선 웨스트포인트가 관광객용 퍼레이드를 펼치는 정도다. 대규모 국가행사로 치르는 나라는 러시아 중국 북한이다. 薩물?북한의 열병식은 스탈린의 제대형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북한의 열병식은 북한 정치 지형의 축소판이다. 열병식 참가자들로 정치가 돌아가고 열병식 무기로 북한의 군사 수준이 확인된다.

북한이 그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을 펼쳤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풀 죽은 장면도 많았다. 우선 기계화부대보다는 군인의 수가 많았다. 제트기도 등장하지 않아 연료부족에 허덕이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장비보다는 몸으로 때운다는 식이었다. 이 행사를 위해 북한 주민들에게 돈을 거뒀다는 얘기도 있다. 외교관들도 외화벌이에 나섰다. 그만큼 경제사정이 심각하다는 증거다. 이미 국영기업의 활동이나 배급은 거의 정지상태라고 한다. 오로지 ‘장마당’ 경제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중국 베트남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여전히 제조업 발전이 시도되지 않고 있고 이것이 열병식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분석했다. 흥미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여전히 열병식에 목숨을 걸고 있고, 군인들은 관절염의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온몸을 수직으로 흔드는 기이한 행진 모습에 집착하고 있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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