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최연소·최다선, 최초 의원직 제명…"닭의 목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입력 2015-11-22 18:22  

YS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

3선 개헌·유신반대 투쟁…초산테러·의원직 제명 수난
신군부 집권 뒤에도 시련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로"…3당합당으로 문민정부 열어
DJ완 평생의 라이벌·동반자…2009년 DJ 서거 앞두고 화해
청와대 칼국수 오찬 파격…임기말 아들 비리로 오점



[ 유승호 기자 ] 대통령을 꿈꾸던 섬마을 소년에서부터 군사독재를 종식시킨 문민정부 시대까지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에서 누구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최연소·최다선 국회의원이라는 화려한 정치 이력을 가졌지만 군사독재 시절 가택연금을 당하고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민주화 투사로서 험난한 길을 걸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는 등 개혁을 이끌었지만 임기 말 차남 현철씨가 한보그룹 사태 관련 비리로 구속되고 외환위기를 막지 못해 오점을 남겼다. 좌우명으로 삼았던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말처럼 생전 그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주요 고비에서는 ‘정치 9단’이라는 별명답게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며 상황을 헤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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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꿈꾼 섬마을 소년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경남 거제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 씨와 어머니 박부련 씨 사이에서 6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멸치 어장을 소유한 부친 덕택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통영중학교에 다닐 때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을 벌이고 한국 학생을 차별하던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배짱 있는 성격이었다. 광복 후 부산제2중학교(경남중) 3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하숙집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서 붙여 놓는 등 대통령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51년 장택상 국회부의장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제에 출마해 만 26세의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이후 모두 9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함께 최다선 기록도 갖고 있다.

험난한 민주화 투쟁의 길

여당의 젊은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김 전 대통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사사오입 개헌)에 항의하며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 창당에 참여,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그는 야당 지도자로서 몸집을 키워 나갔다. 1963년 군정 연장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됐고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타고 있던 승용차 창문에 괴한들이 초산을 뿌리는 테러를 당했다.

1979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뒤 “박 대통령은 물러날 준비를 하라. 불행한 대통령이 되지 말기를 바란다”고 했던 그는 같은 해 10월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인 사건을 계기로 총재 직무집행 정지를 당하고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당시 그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을 남겨 화제가 됐다.

신군부가 집권한 뒤로도 가택연금과 정치활동 규제로 11, 12대 총선에 출마하지 못하는 등 시련은 계속됐다. 1983년엔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낙선한 김 전 대통령은 1988년 총선에선 제3당으로 밀리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여당이던 민정당,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선언하고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떠올랐다.

군사정권 세력과 손잡은 것에 대해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결국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권을 거머쥐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애증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동반자와 라이벌 사이를 오갔다. 김 전 대통령은 DJ에 대해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라고 표현했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선 김 전 대통령이, 2년 뒤인 1970년 대선 경선에선 DJ가 승리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 단일화에 실패하며 갈라섰던 두 사람은 2009년 DJ 서거를 앞두고 화해했다.

개혁 드라이브…아들 비리로 오점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나는 돈을 받지 않겠다”며 본인의 재산을 먼저 공개한 뒤 공직자들이 재산을 공개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공무원 3000여명이 형사처벌이나 징계를 받았다. 이 같은 개혁으로 취임 초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90%를 웃돌았다.

청와대 공식 오찬에 평소 즐겨 먹던 칼국수를 내놓고 부친의 어장에서 잡은 멸치를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등 소박한 생활도 화제가 됐다. 대통령 임기 말엔 차남 김현철 씨가 한보그룹 부실 사태에 연루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는 등 잇단 부정부패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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