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일본이 '도쿄전범재판'을 재검증한다는데…군장성까지 오른 조선인 '홍사익'은 누구?

입력 2015-12-11 19:32  

장원재 박사의 '그것이 알고 싶지?' (2) 도쿄전범재판과 홍사익


‘도쿄 전범재판을 검증하는 위원회가 총리 직속기관으로 설치된다.’ 지난 11월12일 일본 여러 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도쿄 전범재판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고, 일본의 잘못을 국제적으로 규명하는 절차였습니다. 독일 전범들의 책임을 물은 재판은 뉘른베르크재판입니다. 도쿄재판에서 일본인 A급 전범 25명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고, 그중 7명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물의 빚을 재검증 움직임

일본이 이 재판을 검증하겠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물의를 빚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드리기로 하고, 오늘 칼럼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가 보겠습니다. A급 전범이 있다면 B급, C급 전범도 있나? 있습니다. 연합국이 지목한 조선인 전범도 있나? 있습니다. 사형당한 인물도 있나? 있습니다. 홍사익( 1889년 3월4일~1946년 9월26일) 중장입니다. 홍사익은 일본 남방 ‘B급 전범으로 사형당한 이 인물은 그렇다면 친일파의 핵심인가’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연합국 국제군사재판은 A급 전범을 ‘국제조약을 위반하여 침략전쟁을 기획, 시작, 수행한 사람(평화에 대한 죄)’이라고 정의합니다. B급은 ‘전쟁법과 전쟁관습법을 위반하고 살인, 포로학대, 약탈 등을 저지른 사람들(전쟁법규를 위반한 자)’이며 C급은 ‘상급자의 명령에 의해 고문과 살인을 직접 행한 사람들(인도에 대한 죄)’입니다. 홍사익은 일본 패전 당시 필리핀에서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수많은 연합국 포로들이 사망했던 까닭에 포로학대 혐의를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홍사익은 일본 육사 출신입니다. 일본군 정식 코스를 밟아 장성이 된 사람은 왕족을 제외하고는 홍사익이 유일합니다. 홍사익의 아버지는 경기도 안성의 자작농이었습니다. 총독부 기관지 성격의 신문이었던 매일신보 1920년 12월16일자에는 홍사익이 ‘일본 육군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습니다. 육군대학은 현역 군인 중 최고의 엘리트만이 갈 수 있었던 ‘출세의 보증기관’이었습니다. 장성 진급 후 찍은 가족사진도 일본 전통복장을 입고 촬영했습니다.


창씨개명 않은 홍사익

이처럼 확실한 친일파로 보이지만, 홍사익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홍사익’을 일본식 발음 ‘고 시요쿠’로 읽기는 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홍사익’이라는 이름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늘 일본말을 했지만 조선식 억양을 일본식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이 점을 지적하면 ‘내 출신이 조선 아니냐’라고 당당하게 말했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제헌,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청산리대첩의 영웅 지청천(1888~1957) 장군이 홍사익의 일본 육사 동기입니다.

일본군을 이탈해 독립군에 합류한 지청천은 홍사익에게도 사람을 보내 탈영을 권유합니다. 홍사익은 독립군 가족의 생계를 보살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1944년 홍사익이 필리핀으로 발령받을 당시에는 지청천과 동아일보 모 기자 등이 구체적인 탈영루트를 준비하고 재차 독립군 가담을 권유합니다. 홍사익은 ‘나도 일본이 근일 내에 패전하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조선 출신으로 가장 계급이 높은 내가 독립군에 가담한다면 지금 일본군에 입대해 있는 수많은 조선 청년들의 목숨이 어찌 되겠는가. 나 하나 살자고 숱한 생명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다’고 거절합니다.

포로를 야만적으로 다룬 혐의

일본은 1944년 말 조선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했습니다. 징병제가 실시되기 전 지원병으로 입대한 숫자가 2만3681명, 징병 이후 20만9279명이 일본군에 입대했습니다. 홍사익이 ‘전쟁법규 위반’으로 교수형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했습니다. 일본군이 운영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포로들을 야만적으로 다룬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롯이 홍사익의 책임일까요? 1945년이라면 일본군조차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시기입니다. 포로수용소의 사정이 어떠했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일본군 내부에서조차 ‘작전 지휘관이 아닌 홍사익이 사형언도를 받은 것은 지나치다’는 여론이 있었고 실제로 구명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포로들을 관리 감시하는 군속 중에는 조선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이 일본인 군속보다 포로들을 더 가혹하게 다뤘다는 증언이 많아 홍사익이 사형을 피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전범재판 당시, 홍사익은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시종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마닐라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날, 결과를 묻는 주변사람들에게 ‘갑종합격’(일본어로 ‘교수(형) 합격’과 발음이 같습니다)이라고 소리치며 자기의 목숨을 소재로 한 농담을 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

독립군에 합류했더라면

홍사익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친일파’라고 단죄하려면 그 인물의 생애가 시종일관 명백하게 일본 군국주의에 기여했다는 증거가 나와야 합니다. 문제는 보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경우입니다. 사실은, 세상사 모든 일이 다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홍사익이 2차 대전 막판에 독립군에 합류했더라면(분명히 그럴 기회가 있었습니다) 역사는 그를 친일파로 분류했을까요? 그렇다면 그의 탈영 이후 벌어졌을 수많은 조선출신 병사들에 대한 학대와 학살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했을까요? 여러분이 보시기에 홍사익은 친일파입니까, 아닙니까?

○지난 회 퀴즈정답: 둥근 공(ball)을 사용하지 않는 올림픽 구기종목은 하계 올림픽의 배드민턴, 공의 이름은 셔틀 콕이다. 동계올림픽에서는 아이스하키, 공의 명칭은 ‘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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