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춘원 이광수

입력 2016-08-08 17:24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춘원 이광수(李光洙)만큼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 문인도 드물다. 그에게는 ‘식민지 조선의 조숙한 천재’ ‘현대문학의 선구자’와 함께 ‘친일 원죄의 배태자(胚胎者)’라는 평가가 늘 따라붙는다. ‘한국 현대소설의 아버지면서도 유난히 흠이 많은 아버지’라는 꼬리표도 함께.

그의 소설 《무정》은 전근대적인 서사문학의 문법을 바꾸고 현대성을 개척한 걸작으로 꼽힌다. 이전 소설이 주인공 일대기를 따라가던 것과 달리 한 달가량의 시간을 배경으로 소설의 변별력을 보여준다. 고대 소설 문장에서 벗어나 종결어미 ‘~다’를 쓰거나 현재 진행형 등을 활용하면서 순한글 문학의 언문일치를 처음으로 정립했다.

문학 외 영역에서는 수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평북 정주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 때 콜레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 담배장사로 끼니를 해결하며 고아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그는 식민지 청년으로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도산 안창호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돼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45세 때인 1937년 흥사단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폐결핵으로 보석된 이듬해부터는 친일로 돌아섰다. 2차대전 말기인 1943년 말에는 학병 권고 강연까지 했다. 광복 후 반민특위 재판에 회부돼 옥고를 치른 그는 6·25 때 납북돼 북에서 병사했다. 이런 그의 일생을 한두 단어로 평가하는 건 쉽지 않다.

그는 《나의 고백》에서 일본군에 지원하자고 한 것은 참정권과 평등권이라는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설명했다. 병역 없이는 권리도 갖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1941년 소설가 김팔봉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고, 조선인의 각료 진출 등을 거쳐 독립을 쟁취하자고 썼다. 미국 흑인들이 2차대전 참전 후 실질적인 평등권을 얻었던 것과 맞닿는 논리였다.

광복 후 《백범일지》의 윤문과 대리집필을 맡은 것도 뜻밖이다. 김동인이 “쓸 게 없다”며 포기한 것을 그가 대신 집필했다는 설도 있다. 안창호 일대기도 그가 썼다. 이광수에 감화돼 일본군에 지원했던 장준하가 그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에 그렇게 반대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최근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 제정이 친일 논란 때문에 철회됐다. 평론가 김현의 말마따나 아직도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가 춘원인 것 같다. 북한은 1970년대 그의 무덤을 평양으로 옮기고 현대문학의 개척자로 예우하고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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