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눈에 비친 인간의 허영과 어리석음

입력 2016-12-07 17:35   수정 2016-12-08 05:07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사라마구
장편소설 '코끼리의 여행' 출간



[ 양병훈 기자 ] 코끼리가 느릿느릿 묵직하게 움직인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걸어가는 중이다. 1551년 유럽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포르투갈의 왕이었던 동 주앙 3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대공에게 코끼리 ‘솔로몬’을 선물로 보냈다. 솔로몬은 인간 호송대와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고 유럽 대륙을 가로지른다. 지나는 곳마다 코끼리를 처음 본 사람들은 온갖 호들갑을 떨며 관심을 보인다. 그냥 구경만 하는 게 아니다. 솔로몬에게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거나 솔로몬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다. 정작 솔로몬은 아무 말이 없다.

포르투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주제 사라마구(1922~2010·사진)가 타계하기 2년 전에 발표한 장편소설 《코끼리의 여행》(해냄)이 번역돼 나왔다. 그는 이 작품에서 솔로몬과 호송단의 이동 과정을 중계한다. 여행의 주인공은 솔로몬이지만 작품의 초점은 솔로몬보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다. 작가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솔로몬을 둘러싼 인간들의 허영과 어리석음, 권력의 속성 등을 풍자한다. 사라마구의 다른 작품처럼 문장부호라고는 마침표와 쉼표만 있고 문단 나눔도 많지 않다.

작품에는 좌충우돌하는 인간 군상이 넘쳐난다. 포르투갈과 오스트리아 군대는 솔로몬을 어떻게 인수·인계할지를 놓고 전쟁까지 들먹이며 신경전을 벌인다. 포르투갈로 가기 전 인도에서부터 솔로몬을 따라온 코끼리 몰이꾼 수브흐로는 앞으로 먹고살 일이 걱정이다. 성직자들은 솔로몬이 무릎을 꿇게 하는 속임수를 써 “복음의 메시지가 동물의 왕국에도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려 한다. 솔로몬의 털을 우려낸 물을 마시면 설사병이 낫는다고 믿는 사람, 털을 아몬드 기름에 담갔다가 두피에 문지르면 탈모를 멈출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온다.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솔로몬을 자신의 정치·종교 사업에 이용하려고 궁리한다. 작가는 초탈한 듯 큰 눈을 끔뻑이는 솔로몬을 통해 ‘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하다. 세상살이의 단순한 진리를 설파하는 작가의 말이 명쾌하다.

“인간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기름으로 절인 코끼리 털이 대머리를 치료할 수 있다고 쉽게 믿듯이, 자기 안에 인생의 길을 인도해줄, 심지어 산의 고개마저 통과하게 해줄 외로운 빛이 하나 있다고 쉽게 상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알프스의 늙고 지혜로운 은자가 말한 적이 있듯이, 우리 모두 언젠가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을 번역한 정영목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는 “작가가 코끼리의 눈높이로 내려오면서, 아니 올라가면서,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인간은 풍자의 대상이 된다”며 “기록된 역사적 사실 자체에서는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가장 우화적인 소설을 만들어냈다”고 평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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