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안중근의 숨결 서린 하얼빈…독립의 열정 '차가운 땅'에 잠들다

입력 2017-04-09 16:40   수정 2017-04-09 16:41

윤태옥의 인문기행 (6 )·끝 - '무장투쟁의 현장' 만주

이토 히로부미 처단한 하얼빈역 역사 1층엔 안중근 의사 기념관
다롄의 뤼순감옥 사형장엔 '죽음에 이른 길' 남아있어
항일투쟁 자긍심 전해주는 봉오동·청산리 기념탑




만주는 뜨거운 땅이었다. 일제에 항거해 무장독립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첫 번째 현장은 하얼빈역 1번 플랫폼이다.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다. 역사의 그 순간, 총을 쏜 자와 총에 맞아 절명한 자, 국권 침탈의 분노와 제국주의의 오만함을 처단하려는 의사와의 거리는 불과 7m였다. 근대 일본의 초대 총리였고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이었던 일제의 거물을 조선인 안중근이 직접 처단한 것이다. 이로써 조선인이 결코 식민지로 주저앉지 않았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보여줬고, 조선인의 독립을 향한 의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안중근 흔적 남아 있는 뤼순 감옥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얼빈역 역사 1층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었다. 지금은 역사 개축 공사로 휴관했지만 안중근 의사가 역사적 투쟁을 벌였던 그 자리는 아직도 남아 있다. 1번 플랫폼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확인해서 표를 사고 탑승시간에 맞춰 들어가면 안 의사의 저격 지점과 이토의 피격지점 두 개의 표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저격 지점에는 삼각형 표지가, 그로부터 열 걸음 정도 떨어진 피격 지점에는 사각형 표지가 그려져 있다.

안 의사는 다롄의 뤼순감옥에서 사형당했다. 뤼순 일아감옥에서 관람 코스를 알려주는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안 의사의 독방에 이르게 된다. 독방 벽에는 ‘조선 애국지사 안중근’이란 표지가 부착돼 있다. 이 감방에 구금된 채 심문을 당하고 재판을 거쳐, 감방에서 조금 떨어진 교형장(絞刑場)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사형집행일은 1910년 3월26일이었고 안 의사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감방에서 나와 사형장 쪽으로 걸어가면 안중근이 죽음에 이른 길을 두 발로 밟아볼 수 있다. 사형장 가는 길목에 흰색 바위로 세운 표지가 하나 있다.

“사형판결을 받은 항일지사는 손과 발을 결박당한 채 간수에 압송돼 이 길을 걸어 사형장으로 갔다.”

표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벽돌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교형장이다. 교형장 바로 옆의 높은 담장에 설치된 출구로 나간다. 죽어서만 나가는 특별한 문이다. 감옥묘지는 뤼순감옥 바로 뒤에 있는 야산이다. 교통호처럼 길게 파인 구덩이에 일렬로 놓고 그대로 흙을 덮어 매장했다.

당시의 감옥묘지를 발굴하고 복원해 별도의 전시실을 둘러보면 안중근이 어떻게 묻혔을지를 상상할 수 있다. 1971년 실제 발굴한 시신 몇 구도 전시돼 있다. 만주의 수많은 항일 투사들이 이곳에서 죽었고 훗날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도 없게 촘촘하게 묻혔다. 애국지사 신채호, 이회영 선생도 이곳에서 순국했다.

청산리대첩 기념비 보며 자긍심 느껴

1920년대 무장투쟁의 사적지로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기념탑을 빼놓을 수 없다. ‘봉오동 반일전적지 기념비’는 투먼시 수이난촌 안쪽의 저수지에 있다. 옌지(延吉)에서는 북동으로 60㎞ 정도 가야 한다. 청산리대첩 기념탑은 옌지에서 백두산 방향으로 룽징(龍井)과 허룽(和龍)을 거쳐 약 95㎞를 가야 한다. 지방정부에서 운영하는 청산임장(靑山林場) 바로 안쪽의 언덕 위에 있다.

두 기념탑 모두 당시 항일 무장투쟁에 대한 자긍심이 진하게 배어 있다. 청산리 대첩 기념비의 비명(碑銘)은 ‘경신년 대참안중 조난당하신 동포 원혼들이여, 고이 잠드시라! 청산리 전역 중 피 흘려 분전하신 항일 영렬들이여, 영생불멸하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일제가 청산리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독립군의 기반이었던 조선인 촌을 초토화시켰다. 민간인 2600여명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것이다. 경신참변이다. 청산리대첩과 경신참변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독립군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고 결국 온몸으로 보복까지 당해야 했던 동포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빈현 중심 시가에서 동쪽으로 20㎞를 더 가면 왕칭먼진(旺淸門鎭)이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6㎞ 정도 내려가면 오른쪽 야산에 양서봉(梁瑞鳳) 기념비가 있다. 이곳을 찾았을 때 먼저 중국동포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어디서 왔냐면서 말을 붙여왔다.

“이 석상은 원래 조선족 소학교에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소학교가 문을 닫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 동포들이 돈을 모아서 여기 땅을 사서 옮긴 것이죠. 이 양반 대단한 장군이었죠. ”

이들은 선양에 사는 중국 동포였다. 그 가운데 한 명은 폐쇄된 소학교의 교장이었단다.

남·북 모두 존경하는 양세봉 장군

양세봉은 평안북도 철산에서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고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신빈현으로 이주했다. 고된 소작농을 벗어나진 못했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1922년 독립단 대장 정창하 휘하의 지방 공작원으로 항일운동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해에 천마산대 독립군, 1923년에 광복군총영에 합류했다. 이후 참의부와 정의부의 무장대오에서 활동했고 3부 통합운동을 거쳐 1929년 12월 조선혁명당이 조선혁명군을 창설할 때 부사령이었다. 양세봉은 1932년 총사령이 됐고 영릉가전투, 흥경성전투 등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격퇴해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토벌공세는 강력했고 1933년부터 조선혁명군은 위축돼 갔다. 1934년 9월 양세봉은 전사했다. 39세였다. 양세봉의 호는 벽해이고 양서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양세봉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한국인 학자가 펴낸 양세봉 전기는 《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 양세봉》(장세윤 저)으로 2016년 12월에야 나왔다.

1930년대의 무장투쟁은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잔혹한 토벌에 밀려 1930년 중반 이후 하나씩 소멸해갔다. 동북항일연군마저 1940년 겨울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의 일부는 북만주 등지에 남아 끝까지 저항했다. 그 중심인물이 바로 허형식이다. 이육사의 외당숙이고 《광야》에 나오는 ‘초인’이 바로 허형식이라는 학계의 주장도 있다. 허형식은 1942년 여름 만주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헤이룽장성 쑤이화시에 허형식 희생지를 알려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윤태옥 < 다큐멘터리 제작자 겸 작가 kimyto@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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