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편해문 "아이들 풀어주고, 그냥 놔두세요…그곳이 바로 기적의 놀이터"

입력 2017-08-11 21:02   수정 2017-08-12 07:25

순천 '기적의 놀이터' 만든 편해문 아동 문학가·놀이터 디자이너


[ 임근호 기자 ]
경북 안동 시내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진 와룡면 이하리. 논밭 사이에 들어선 한 시골집 마당에 나무판자를 투박하게 이어 붙인 기구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미끄럼틀처럼 보이고, 다른 하나는 삼각형으로 우뚝 서 마치 암벽 등반 기구처럼 생겼다. 이 집 주인 편해문 씨는 “동네 아이들이 학교 마치고 돌아오면 이곳은 시끌벅적한 놀이터로 변한다”며 “어제저녁에도 아이들이 여기서 불을 지피며 놀았다”고 마당 한구석의 재를 가리켰다.

불놀이에 투박하고 높은 놀이기구라니, 아이들이 위험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작게’ 자주 다쳐야 크게 안 다칩니다. 안전하게만 자란 아이는 위험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해 더 위험해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직업은 아동문학가 겸 놀이터 디자이너. 평생을 아이들과 놀이를 연구하며 보냈다. 그는 지난해 5월 전남 순천에 문을 연 ‘기적의 놀이터 1호’를 만든 주인공이다. 아이들과 부모들의 열띤 호응에 순천시는 올 5월 ‘기적의 놀이터 2호’를 개장했고, 2020년까지 이를 10개로 늘리기로 했다.

‘살아가는 힘’ 된 어린 시절 놀이

그는 1969년 서울 사당동 산동네에서 태어났다. 산동네 골목을 누비며 신나게 놀던 어린 시절이 지금을 사는 힘이 됐다고 말한다. “지금은 아파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당동 산 24번지 어디쯤 살았어요. 그때만 해도 물을 공동우물에서 지게로 길어다 먹던 시절이었는데, 산동네에도 상하수도 시설을 설치한다고 동네 곳곳에 아이 키만 한 콘크리트관이 쌓여 있었어요.”

변변한 놀잇감이 없던 동네 아이들에게 커다란 상하수도관은 그야말로 멋진 놀이터가 됐다. 그의 말에 따르면 “놀이터이자 아지트이자 비밀기지”였다.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우주인 놀이를 하고, 밤에는 랜턴으로 불을 켠 채 그 속에서 ‘비밀 회합’을 했다. 그는 “2~3층으로 높이 쌓인 관 위를 휙휙 건너뛰기도 했다”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데 그 아찔함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아이들이 매료된 것 같다”고 했다.

아이들이 ‘노깡’이라 부른 상하수도관 말고도 바위가 많았던 사당동 산과 판잣집으로 이뤄진 동네 골목이 모두 아이들에겐 신나는 놀이터였다. “숨바꼭질하다 밤이 깊어져 술래가 엄마에게 끌려들어가요. 그러면 숨어서 기다리던 아이들은 어느 순간 ‘술래가 집에 갔나 보다’하고 알아서 집에 가는데, 간혹 숨어 있다 잠이 드는 애들이 있어요. 그러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서 그때부터 진짜 숨바꼭질이 시작됐죠.”

그가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산동네 판자촌이 철거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집안은 어려워졌다. 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편씨는 대구 친척집에 내려갔지만, 곧 고등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던 그의 마음을 어루만진 건 우리의 옛 노래였다. “우연히 우리 가락을 들었는데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느껴졌어요.” 그는 안동에 민속학을 배울 수 있는 대학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검정고시를 치고 한국에 유일하게 민속학과가 있는 안동대에 들어갔다.

우리 노래 가운데서도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아이들이 부르는 전래동요였다. 민속학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그는 사라져가는 전래동요를 찾아 전국 구석구석을 다녔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물어 그가 되살려낸 옛날 아이들 노래만 250개가 넘는다. 그는 “아이들 노래를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놀이로 이동했다”고 했다. “문득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 세대는 무슨 힘으로 이런 힘든 세상을 살아왔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건 ‘놀이의 힘’이었죠. 돌이켜보면 저도 그랬고요.”

그는 1998년 창작과비평사가 주최한 ‘좋은 어린이 책’ 공모에서 대상을 받고 아동문학가로도 등단했다. 《동무 동무 씨동무》 《산나물아 어딨노?》 《께롱께롱 놀이노래》 《아기를 주신 삼신할머니》 같은 책을 썼다. 글을 쓰려고 총각 때 안동 시골 마을의 다 쓰러져가던 집을 샀다. 지금 그와 가족들이 사는 집이다. 그는 “조금씩 인세 수입이 생길 때마다 구들 놓고 담도 새로 쌓고 해서 지금처럼 된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만들기

편씨는 2012년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2015년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를 잇달아 펴냈다. 그가 기획한 ‘놀이 3부작’ 가운데 두 편이었다. 그는 “놀이터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책을 내게 됐다”며 “지금처럼 도전할 것도 없고 상상력도 빈곤한 놀이터에서 10년을 보낸 아이들이 10년, 20년 뒤에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지 아득했다”고 말했다.

놀이터 바닥의 모래는 더럽다고 사라지고 한 회사에서 만들어 공급한 획일적인 디자인에 안전만 강조하다 보니 아이들이 흥미를 갖지 못하는 지루한 놀이터로 변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이런 경향은 2008년 시행된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으로 가속화됐다고 한다. 정부가 정한 안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놀이터는 모두 폐쇄됐다. 이후 지어진 놀이터는 정부 기준만 충족하려 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놀이터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열 살까지의 시기는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인데, 이때 평생 쓸 삶의 밑바닥 힘을 놀이로 다져야 한다”며 “그런데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없어 요즘 아이들은 마트에서 놀고 소비 놀이에 취해 있다”고 했다.

그는 오랫동안 기적의 놀이터 운동을 펼쳤다. 책도 펴내고 강연도 하며 ‘놀이기구 없는 놀이터’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놀이터’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차피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있는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놀이기구가 없어도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 논다는 얘기였다.

2014년 5월 독일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와의 만남은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벨치히는 1주일을 머물다 독일로 돌아갔다. 편씨는 적금을 찾아 독일 뮌헨으로 가는 네 식구 비행기 표를 끊었다. 아직 벨치히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고, 유럽의 놀이터가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귄터가 만든 놀이터를 보고 당시 7세이던 딸이 달려가더니 알아서 놀아요. 제가 가까이 가려고 하니 귄터가 그냥 놔두라고 해요. 아이들에겐 시도하고 도전해보는 것이 놀이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놀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해야 한다고요. 한참을 오르고, 내리고, 타고, 미끄러지며 놀다 온 딸이 한마디 해요. ‘귄터 할아버지, 놀이터 참 잘 만드네!’ 좋은 놀이터인지 아닌지는 아이들이 제일 잘 알았던 거죠.”

그가 4년 전 순천 기적의 도서관에서 강연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조충훈 순천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순천에 기적의 놀이터를 조성해달라고 했다. 편씨는 ‘기적의 놀이터 총괄 계획가’라는 직함을 받았다. 이천식 공원녹지사업소 과장이 그와 함께 간사로 일했다. 예산도 다 있었다. 하지만 기적의 놀이터 1호가 탄생하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1년은 순천시 공무원과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태스크포스팀에서 놀이터를 함께 공부했어요. 그다음엔 주변 주민과 아이들, 학교를 찾아다니며 공터에 놀이터를 만들건데 어떤 놀이터를 원하는지 묻고 워크숍을 열었습니다.” 기적의 놀이터 1호에는 어린이 200여 명의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 놀이터는 그해 공공건축 최우수상과 창의행정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날 인터뷰를 마칠 무렵 광주 서구의 놀이터 조성사업을 맡은 업체 관계자들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놀이터를 의논하기 위해서란다. 편씨는 서울시, 경기 시흥시와도 놀이터를 새롭게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놀이에 목적이 있어선 안 됩니다. 머리를 좋게 하거나 창의성을 기르는 수단으로 놀이를 보는 것은 놀이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해요. 놀이는 아이들이 자유를 만나고 스스로 살아가는 인간으로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풀어주고 알아서 놀게 내버려둬야 합니다.”

■ 순천 '기적의 놀이터'

미끄럼틀·시소·그네는 없고…너른 공터에 모래밭·고목·개울·언덕 있어요
200여 단체가 벤치마킹

지난해 5월7일 전남 순천 연향2지구 호반3공원에 기적의 놀이터 1호 ‘엉뚱발뚱’(사진)이 문을 열었다. 이 놀이터에는 미끄럼틀도, 시소도, 그네도 없다. 아파트 사이 3000㎡ 넓이 공터에 마련된 이 놀이터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모래밭과 팽나무 고목. 모래밭 앞으론 얕은 개울이, 뒤로는 잔디로 덮인 언덕이 있다.

걸리적거리는 놀이기구 없이 너른 땅에서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뛰어다닌다.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상하수도관을 닮은 굴을 통과하고, 있는 힘을 다해 물이 나오도록 펌프질을 한다. 평일에는 200여 명, 주말에는 500~600여 명의 어린이가 찾았고, 그동안 200여 단체가 벤치마킹을 위해 다녀갔다.

이 놀이터를 설계한 편해문 놀이터 디자이너는 “깨진 병이나 날카로운 못 같은 위험 요소는 당연히 제거해야 하지만 통제 가능하고 극복할 수 있는 위험은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맘껏 뛰논 덕분에 아이들은 체력이 좋아지고, 집에서 짜증부리는 것도 줄었다고 한다. 그는 “2~3개 보내던 학원을 1~2개로 줄이고 저녁때 부모들이 아이들 데리고 나오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다.

지난 5월2일엔 순천 해룡면 신대지구에 기적의 놀이터 2호 ‘작전을 시작하-지’가 개장했다. 5000㎡ 넓이의 이 놀이터는 1호와 비슷하지만 ‘스페이스 네트’라는 놀이기구가 새로 생겼다. 에펠탑 모양의 그물망이다. 아이들이 그물을 붙잡고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전신 근육을 쓸 수 있도록 고안됐다.

안동=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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