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흔든 판결들] "키코, 환헤지 상품 맞다"…불충분한 위험고지(告知)는 문제

입력 2017-09-22 19:29   수정 2017-10-27 17:05

<21> 키코(KIKO) 판결
(대법원 2013년 9월26일 선고, 2011다53683, 53690 전원합의체 판결)




2008년 12월, ‘모나미 결정’을 시작으로 소위 키코(KIKO·knock in knock out·환헤지용 통화옵션상품) 사건의 서막이 열렸다. 수출 중견기업들의 우울한 날들이 시작된 것이다. 첫 가처분 사건에 대해서는 원고 측(모나미) 주장이 받아들여졌지만, 이후 대부분의 가처분 사건과 손해배상청구사건은 수출기업의 패소로 마무리됐다.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한국도 자유롭지 못했다. 키코 사건은 우리 중견기업들의 바탕을 뒤흔든 사건이다. 이 사건 중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된 게 수산중공업 사건이었고, 대법원은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 판결의 대상으로 삼아서 법리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 전원합의체 판결에 의해 사건들은 정리됐다.

이름도 기묘한 키코 통화옵션계약은 환율이 일정 범위에서 움직이면 미리 정한 환율(계약환율)로 기업이 달러를 은행에 팔 수 있도록 한 파생금융상품이다. 수출대금의 환율변동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기업의 은행에 대한 녹아웃(knock-out) 풋옵션(put-option)과 은행의 기업에 대한 녹인(knock-in) 콜옵션(call-option)을 일정한 비율로 결합한 통화옵션을 의미한다. 계약기간을 1~3년 정도로 하고, 주로 1개월 단위로 만기가 도래하도록 정한 여러 개의 옵션 묶음으로 구성돼 있다.

각 만기일 사이의 기간에 ‘윈도 적용기간’이라고도 부르는 ‘관찰기간’이 존재한다. 시장환율이 ‘관찰기간’ 동안 녹아웃 환율(하단 환율)과 녹인 환율(상단 환율) 사이에서 움직였으면 기업은 당사자 간에 미리 정한 계약환율인 행사환율로 은행에 달러를 매도할 수 있는 권리인 풋옵션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만기환율이 행사환율(계약환율)과 녹인 환율 사이에 있으면 기업으로서는 풋옵션을 행사하는 것보다 시장환율로 달러를 매도하는 편이 유리할 것이므로, 풋옵션은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환헤지보다 돈버는 상품으로 인식

각 관찰기간 내에 환율이 녹아웃 환율 아래로 한 번이라도 내려가면 계약은 효력을 상실하고, 만약 관찰기간에 시장환율이 녹인 환율 이상으로 한 번이라도 올라가면 은행의 콜옵션(매수권리) 행사에 의해 기업은 계약에서 정한 레버리지 비율에 따라 계약금액의 2배 혹은 그 이상의 달러를 계약환율로 은행에 매도해야 하는 의무가 발생하는 구조로 돼 있다.

수출기업들이 갖는 리스크는 환율의 변동이다. 환율에 대한 대응을 잘못하면 고생해서 돈을 벌고는 정작 환손실을 봐서 이익이 줄어들게 된다. 원래 이 상품은 환리스크를 피하기(hedge) 위한 상품인데, 일부 계약자는 이 상품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는 대신 그냥 주변에서 돈을 번 결과만 보고 투기성(speculative) 상품으로 이해해 무작정 가입한 경우도 보인다.

이 사건 계약을 체결해 피해를 봤다고 해서 초기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에 가입한 기업은 1000개가 넘었고, 피해 규모는 최소 3조원 수준이며, 도산과 상장폐지 등으로 소송에 참여하지 못한 기업까지 포함하면 10조원 규모로 추산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에 따르면 키코와 비슷한 형태의 파생상품으로 인한 거대손실 사례는 한국 일본 중국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홍콩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브라질 멕시코 등 중남미 지역과 폴란드 등 유럽 지역에서도 발생했다.

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증언

이 사건에는 두 명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전문가로서 감정의견을 제시했다. 우리 법정에서 노벨경제학자들이 증언하는 장면은 이후에도 기억될 장면이 됐다. 우선, 피해기업 측의 로버트 엥글 미국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는 2009년 12월17일 키코에 대해 절대로 중소기업에 판매해서는 안되는 상품을 판매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키코 계약에 따라 풋옵션에 의한 헤지 효과가 100%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기업이 얻을 수 있는 헤지 효과가 최대 12억원 정도임을 감안할 때 12억원의 헤지 효과를 위해 48억원의 비용을 사용한 셈이 된다. 결국 수산중공업이 12억원의 보험금을 위해 48억원의 보험료를 내고 보험에 가입한 셈이 되는 이 상품은 설계 자체가 은행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터무니없는 상품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녹인 시 매도금액을 약정금액의 2배로 했다는 은행 측 주장에 녹인이 될 확률은 처음부터 50%에 불과했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은행 측은 스티븐 로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슬론경영대학원 교수를 내세웠다. 그는 키코가 수출기업의 환헤지 상품으로 적합하다면서, 환율이 하향안정 추세였던 상황에서 기업에 유리한 조건과 불리한 조건을 대등하게 맞춘 상품이고, 은행이 얻은 마진에 대해서도 계약금액의 0.3~0.8% 정도로 관행상 적절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또 키코 계약에서 환율이 상승했을 경우 기업 손실이 2배 속도로 증가한다는 엥글 교수의 증언은 외화 실물자산(달러)을 보유한 기업이 환율 상승으로 손실을 봤다는 것으로, 헤지의 기초를 무시한 주장이라고 했다.

대법원 “키코에 헤지기능 있다”

대법원은 2013년 9월26일 4건의 키코 사건 전원합의체판결(세신정밀, 삼코, 수산중공업, 모나미)에서 키코 상품의 본질에 관해 헤지의 부적합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사기 또는 착오로 인한 취소 등 기업 측이 주장한 무효 또는 취소 사유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피고인 은행 측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법원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판단한 것은 적합성 원칙(투자자의 특성에 적합하게 투자를 권유할 의무가 있다는 것)과 설명의무에 집중됐다. 이 사건은 상품이 헤지상품인지 여부가 초기보다도 더 문제가 됐다. 대법원은 헤지거래를 하려는 당사자가 현물의 가격변동과 관련해 특별한 전망이나 목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특정 구간에서만 위험회피가 되는 헤지거래도 다른 거래조건들과 함께 고려해 선택할 수 있다며, 전체 구간에서 위험회피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구조적으로 헤지에 부적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봤다. 따라서 이 사건 키코계약에 헤지기능이 있으므로 헤지상품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위험의 크기에 침묵해선 안돼

키코계약은 더 이상 체결되지 않지만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해 비판적인 논자들은 지금도 키코가 발생 가능성이 낮은 위험은 기업이 스스로 감수하고, 발생 가능성이 높은 위험에 한정해 헤지가 가능하도록 설계된 상품인데도 이 계약을 체결하면 환위험이 모두 회피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판매한 것은 사기라고 주장한다. 속여서 상품을 판매한 것이므로 적합성 원칙, 설명의무도 위반이거니와 사기에 의한 취소도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또 위험의 헤지 여부 판단과 관련해서는 위험의 발생 가능성도 중요하지만 위험의 크기가 중요한데, 대법원은 위험의 크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어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판은 끝났고 법정의 조명은 꺼졌다. 하지만 우리 수출 중견기업들의 슬픔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이 사건에 대한 분석은 계속돼야 한다.

실제 나타난 '블랙 스완'…"걱정마세요" 무조건 믿으면 곤란

미국 월가의 투자전문가 나심 탈레브는 《블랙 스완(black swan)》이란 책으로 세계적인 전문가의 반열에 올랐다. 우리가 생각하는 백조(白鳥)는 당연히 깃털이 흰 새다. 그리고 일생 동안 검은색 깃털을 가진 백조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대체 백조가 검은색이라니!

우리가 검은색 백조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사업자는 고객에게 이런 위험은 일생에 한 번 오는 위험이라거나, 1997년 외환위기 때나 오는 위험이지 평상시에 오는 위험은 아니라고 말하고 금융상품을 판매한다. 하지만 검은 백조는 실제로 있고 주기적으로 금융위기는 온다. 즉, 생길 일은 언젠가 생긴다. 키코 소송은 위험은 존재하지만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금융회사의 말을 믿고 계약을 체결했다가 그 위험이 현실화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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