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공간은 사람과 콘텐츠를 위해 만드는 것이다

입력 2017-11-20 17:49  

근사한 외형에 알맹이 없는 지자체 기념관
정체성 잃고 킥보드 돌아다니는 한옥마을
공간의 헛헛함 채울 콘텐츠부터 고민해야

강철희 < 홍익대 건축도시대학원 교수·종합건축사사무소 이상 대표 >



지방 소도시를 다니다 보면 그야말로 뜬금없는 대형 건축물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십중팔구는 그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박물관이나 기념관이다. 굳이 시간을 내서 들어가 보면 개관식 날짜에 맞춰 급조됐음이 분명한 전시물들이 휑한 공간 여기저기에 겨우 구색을 갖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서울과 광역도시도 예외는 아니다.

겉으로는 성공한 것 같으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쉬움이 큰 경우도 많다. 얼마 전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외국인 동료와 함께 근래 ‘셀카 성지’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지방의 한 한옥마을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단아한 전통건축문화를 살려 만든 마을에 국내외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니 내심 적잖이 기대했다. 그런데 실제로 본 그곳은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을 오감으로 누리는 기쁨보다는 뭔지 모를 씁쓸함이 더 크게 남는 모습이었다. 기와집 모양을 본뜬 건물이 늘어선 거리는 국적불명의 간식거리를 파는 가게들과 조악한 기념품이며 액세서리를 파는 상점, 현란한 불빛이 번쩍이는 오락실로 가득했다.

물론 저잣거리도 조상들의 살던 모습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고, 먹고 노는 일에 귀천을 따지려 드는 ‘꼰대’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황진이 기생 한복과 곤룡포를 입고 팔짱을 낀 커플들, 그 사이를 달리는 전동 킥보드 행렬, 거리에 진동하는 치즈 닭꼬치 냄새 속에서 우리 전통문화를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돌아오는 길, 친구의 한마디가 압권이었다. “여기는 한옥 마을(village)이 아니라 한옥 몰(mall) 같아.”

과감한 투자를 통해 지역에 문화관광명소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로서 위 두 사례에서 느끼는 공허함에 대해서는 같이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의욕이 앞선 행정과 기획의 부재로 변변한 콘텐츠 하나 없이 텅 빈 공간 그리고 양적 지표와 상업적 흥행에 몰두한 나머지 차별성을 잃은 콘텐츠만 가득해 정체성이 사라져버린 공간, 둘 다 알맹이가 빠진 건축의 슬픈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건축가가 설계하는 것을 공간(空間)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비어있는(空) 장소가 아니다. 사람이 만드는 공간이라면 무엇으로든 채워지고 누구든 들게 마련이니 건축의 궁극적인 대상은 공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 들고 날 사람들의 경험과 행동, 생각과 관계인 것이다. 법률가들이 법 조항을 도구로 공동체의 룰을 정하고 시민들이 갖는 자유의 폭을 규정하는 것처럼, 건축가는 건축 환경의 물리적인 구조와 형태를 매개로 사람들의 삶을 조형(造形)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건축가가 설계하는 건물의 콘텐츠 프로그래밍을 고민하고 그 기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콘텐츠 프로그래밍은 건축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간을 채우고 활용할 당사자, 그러니까 문화공간이라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 상업시설이라면 물건을 사고팔 상인과 주민이 함께 머리를 맞대는 시간이 필수적이다. 이런 협업의 과정을 통해 프로젝트의 알맹이가 먼저 영글어야 비로소 건축가는 의미있는 공간을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장 주변의 알맹이 빠진 건축을 되살려 채우는 과제가 곳곳에 산적해 있다. 정부 각 부처는 평창 동계올림픽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만 폐막 이후 ‘올림픽의 저주’를 극복할 경기장 사후 활용방안 마련은 사실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보다 더 시급한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년 지방선거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또 얼마나 많은 공약들이 쏟아져 나올 것인가. 후보들이 앞다퉈 지역 발전을 위한 비전을 쏟아내는 경쟁은 지역구 민주주의의 이점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당선을 위해 치적을 쌓든 생색을 내든, 소중한 국민의 혈세를 쓰는 일이라면 지역을 위한 실속도 꼭 챙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얼마 전 방문했던 어느 해외 작은 도시의 시장이 언젠가 시립 미술관을 짓기 위해 하나씩 미술품을 수집하고 있다며 수줍게 보여준 시청 창고는 우리나라의 웬만한 공공미술관 수장고보다 훨씬 더 내실 있어 보였다. 공간은 사람과 콘텐츠를 위해 만드는 것이다.

강철희 < 홍익대 건축도시대학원 교수·종합건축사사무소 이상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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