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역사에 기록된 첫 백만장자, 황제도 교황도 쥐락펴락

입력 2018-12-27 17:27  

자본가의 탄생

그레그 스타인메츠 지음 / 노승영 옮김 / 부키 / 384쪽│1만8000원

16세기 獨 사업가 야코프 푸거, 채권 방식 대출로 대부호 반열
최고 권력자에게까지 상환 요구

'기업 자유' 위한 군자금 지원 등 유럽에 자본주의 토대 마련

재산은 유럽 총생산의 2% 달해
富 자체 추구한 첫 현대적 사업가



[ 윤정현 기자 ]
“소신이 없었다면 폐하께서는 황제관을 쓰지 못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빌려드린 돈은 이자까지 계산해 지체 없이 상환토록 명하소서.”

1523년 카를 5세가 받아든 독촉장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과 나폴리, 예루살렘의 국왕이었다. 로마시대 이후 가장 넓은 제국을 통치했다. 카를 5세의 이름 뒤에 붙는 칭호만 81개에 달했다.

《자본가의 탄생》은 당시 최고의 권력자에게 채무 상환을 요구한 ‘간 큰 채권자’, 야코프 푸거(1459~1525)에 대한 책이다. 독일인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업가로 꼽지만 많은 이에게 여전히 생소한 이름이다. ‘르네상스의 후원자’ 메디치,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 ‘석유왕’ 록펠러에 비하면 인지도 측면에선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다방면에서 그의 활약은 자본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독일어로 된 푸거의 책은 너무 어려웠고 영어로 번역된 책은 거의 없었다. 월스트리트저널 유럽지사에서 기자로 일했던 그레그 스타인메츠가 “푸거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까닭이다.

푸거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7형제 중 막내인 그가 물려받은 가업은 작은 규모의 직물 매매였다. 하지만 푸거는 직물로 돈을 벌지 않았다. 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이자 대신 권리를 받는 ‘채권 방식의 대출’로 부를 쌓았다. 무역이 활발하고 전쟁이 빈번한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가치가 높은 권리가 뭔지 파악했기에 가능했다.

푸거는 씀씀이가 헤픈 귀족에게 돈을 빌려주고 은광 채굴권과 소유권을 확보했다. 그를 통해 생긴 여유 자금으로 기존 사업인 직물 매매를 확장하기보다 구리로 눈을 돌렸다. 전쟁의 핵심인 대포와 소총의 주원료가 구리여서다. 투자 규모가 크고 회수 기간이 길다는 위험을 안고도 구리 광산을 사들이고 가공 공장을 지었다. 투자 기간을 길게 보고 대출과 동업 등을 활용해 그는 황제와 교황까지 좌지우지하는 자본가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카를 5세가 황제가 되는 데 기반이 된 거액의 자금을 빌려줬고, 교황 레오 10세에게 서신을 보내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높은 이자를 받는 대금업의 합법화를 이끌었다.

책에 따르면 1525년 푸거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재산은 유럽 내 총생산의 2%에 육박했다. 이전 세대인 메디치 가문의 부를 넘어선 규모였다. 그는 역사책에 기록된 최초의 백만장자기도 했다.

저자는 자본주의사에 그가 남긴 발자국의 흔적을 흥미롭게 추적해간다. 푸거가 중심에 있지만 개인의 전기(傳記)라기보다 역사서에 가깝다. 경제, 산업적인 측면에서 푸거의 역할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까지 두루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푸거는 유럽 내 가장 강력한 상업 조직이던 한자동맹에 타격을 입혔고, 자유 기업 체제를 뒷받침하는 전쟁 자금을 지원했다. 복식부기를 도입했고 여러 영업 결과를 하나의 재무제표로 통합했다. 이뿐만 아니라 유럽 기독교 세계를 양분하게 된 종교개혁의 배경에도 그가 있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를 후원하는가 하면 경쟁자와 고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통신원을 곳곳에 파견하는 뉴스 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가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처음으로 돈이 전쟁과 정치를 좌우하는 시대에 살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서술은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영리한 사업가였지만 ‘고집불통에 이기적이었고 때로는 잔인’했던 푸거 개인의 삶도 들여다본다. 그 많은 돈을 손에 쥔 그는 행복했을까. 이 질문에 저자는 “그의 목표는 안락함이 아니라 돈을 벌고 또 버는 것이었다”고 답한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돈으로 권력자의 환심을 샀으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비난을 받았고 중상모략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저자는 그를 “처음으로 부 자체를 추구했고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초의 현대적 사업가”라고 평가한다. 배짱있고 영리한 사업가의 활약을 기반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떠오르던 새로운 산업과 근대 국가의 모습뿐 아니라 종교 분쟁과 정치 암투까지 재미있게 엮어낸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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