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제 부총리를 생각하며…

입력 2019-02-01 16:07  

추도사 - 신상민 前 한국경제신문 사장

1971년 KDI 설립 산파 역할…대규모 부실기업 정리 결단
세평에 연연하지 않았던 외유내강이 어울리는 사람



개발연대의 한국 경제, 그 활기찬 시절의 중심에 있었던 김만제 전 경제부총리가 별세했다. 경제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가 떠나간 빈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지기만 한다.

1971년 37세였던 김 전 부총리는 바로 그해 설립된 국내 최초의 국책 경제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초대 원장을 맡으면서 그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설립자금을 록펠러나 포드재단에서 출연받기 위해 뛰어다니는 등 KDI 설립의 산파 역할을 했지만, 자신이 초대 원장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게 본인의 후일담이다. 원로 경제학자들을 제치고 서강대 부교수였던 그를 발탁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안이었다. “당신을 부원장으로 추천했는데 대통령이 원장으로 낙점했다”는 김학열 당시 부총리의 설명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1960년대 한국 경제학계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설립 등 경제 성장의 주춧돌이 된 주요 국책사업에 대해 이른바 균형성장론을 내세운 반대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그런 여건이 그를 초대 원장으로 발탁하게 된 배경일 것이라고 풀이하는 이들도 있다. 구본호 전 울산대 총장,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 박영철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송병락·홍원탁 서울대 교수 등 그가 스카우트한 해외 박사들로 채워진 KDI는 정말 대단했었다. 거시경제 현안은 물론이고 교육 노동 환경 등 사회개발 문제들도 모두 다뤄 경제기획원이 아니라 범정부적 종합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다른 정부 부처는 물론이고 삼성 현대 대우 LG 등 대기업 그룹이 앞다퉈 종합 경제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KDI의 성공에 자극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재무부 상공부 건설부 등 다른 경제부처의 산하 연구기관 설립은 KDI라는 싱크탱크를 가진 경제기획원에 맞서 자기들 영역을 지키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 결과가 경제정책의 고도화로 이어진 것 또한 분명하다. KDI 효과, 바로 김만제 효과가 1970~1980년대 고도성장에 큰 몫을 했다는 해석이 그래서 가능하다.

KDI 원장 시절 처음 만난 그는 항상 웃는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겪어볼수록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마도 외유내강이란 표현이 그만큼 어울리는 사람도 쉽게 찾기 어려울 것이다. 장관 시절 그의 인사를 지켜보면서 과연 그가 한 것이 맞는지 놀랍기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세평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의 장점이자 단점일지 모르겠다.

국제상사그룹 해체 등 전례를 찾기 어려운 대규모 부실기업 정리를 단행한 것은 그다운 일이었다. 그를 곱지 않게 보는 눈길은 KDI 원장 때나, 장관 때나 결코 적지 않았다. 좋은 것이 좋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았던 사람, 스스로의 판단에 충실하고 선택이 분명했던 사람에게 으레 따라오게 마련인 것들이다. 김 전 부총리의 명복을 빈다.

2019년 2월 1일 신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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