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생활 속 경제이야기] 여성을 생활 전선으로 끌어낸 재봉틀

입력 2019-03-21 18:13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


21세기에 인터넷만큼 한국 경제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이전 발명품 중 가장 혁신적인 것을 꼽으라면 재봉틀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 경제활동에 재봉틀만큼 큰 영향을 준 것은 많지 않다.

먼저 재봉틀은 할부판매 상품의 시조격이다. 초창기 재봉틀은 상당히 고가였다. 1870년대 세계 재봉틀 시장의 4분의 1을 차지했던 싱어(Singer)사 재봉틀은 재봉사 연봉의 5분의 1에서 2분의 1에 이를 정도로 비쌌다. 그러니 가정에 재봉틀을 판매하려면 남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싱어사가 생각한 것은 당시로선 혁신적인 할부판매다. 싱어사는 ‘1달러에 계약하고, 1주일에 1달러만 내면 재봉틀을 가질 수 있다’고 광고했다. 싱어사는 할부판매 방식을 운영하기 위해 수금원 제도를 도입했다. 재봉틀을 판매한 가정집을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며 수금도 하고 사후서비스(AS)도 해주는 방식이었다. 그 덕분에 싱어사는 1912년 미국에서 60%, 세계적으로는 90%에 가까운 시장을 점유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재봉틀은 여성이 경제활동에 참여할 기회도 제공했다. 20세기 이전에는 여성과 남성이 하는 일이 구분됐다. 동업조합인 길드도 남성만 가입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로서는 상당히 복잡한 기계였던 재봉틀은 공장에서 남성들이 사용했다.

그런데 가정용 재봉틀 보급이 늘자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길드는 재봉틀 같은 복잡한 물건은 공장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학계도 여성들의 재봉틀 사용을 우호적으로 보지 않았다. 1869년 아델프 에스파뉴라는 의사는 여성이 재봉틀을 사용하면 팔, 가슴, 복부에 충격을 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다른 의사들도 비슷한 주장을 하며 여성의 재봉틀 사용을 억제하려 했다.

하지만 상류층 여성까지 재봉틀을 사용하고, 중산층 가정에 재봉틀을 놓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이런 편견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성들은 집에 있는 재봉틀을 활용해 간단한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는 부업을 시작했다. 여성들이 가내수공업 형태로 경제활동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시장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한때 한국에서도 재봉틀은 모든 가정의 필수품이었다. 많은 어머니가 재봉틀로 가족의 옷을 수선하거나 부업을 하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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