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재계 密談은 여기서 이뤄진다

입력 2019-05-20 16:24  

'민주화 상징'서 '세미나 명소'로 진화한 달개비

달개비 인기 비결
모두 개별 룸…보안유지 가능
김영란법 저촉 안되는 음식값



[ 김순신 기자 ] 서울 정동 3번지. 콘퍼런스하우스 달개비와 성공회 대성당이 자리한 이곳은 조선시대 때부터 비밀 회동이 잦았다. 조선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 이곳에 있던 사저에서 측근들과 왕을 꿈꿨다. 전두환 정권 시절 재야인사들은 이 자리에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낭독했다. 2012년 문재인 대통령과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대표의 대선 후보 단일화도 이 자리에서 이뤄졌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터의 기운은 여전하다. 기자회견 등 정견 발표가 줄을 잇던 장소에서 주요 인사들이 밀담 및 회의를 여는 메카로 변했을 뿐이다.

밀담은 신뢰할 수 없는 곳에선 할 수 없다. 달개비의 역사와 주인을 알고 싶어하는 주요 인사가 늘어나는 이유다.

20일 오전 7시30분 찾은 달개비 앞은 조찬 모임을 하기 위해 온 정·관계 인사와 경제인들로 분주했다. 함재연 달개비 대표는 “조찬 때도 회의 등으로 28개 방이 거의 차곤 한다”며 “전날 준비해놓은 음식을 내는 호텔과 달리 새벽 5시에 직원들이 나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조용히 대화하는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손님들이 달개비를 찾는 이유”라고 말했다.


정·관계 인사들의 비밀 사랑방

정·관·재계 인사들이 진영과 상관없이 달개비를 찾는 것은 정갈한 음식 때문만은 아니다. 달개비는 사실 식당이라기보다 비밀이 유지되는 회의장에 더 가깝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모든 방이 따로 설치돼 있고, 격실 구조로 방음이 잘되는 편이다. 한 시중은행장은 “‘김영란법’ 때문에 호텔 식사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달개비의 단골손님이 됐다”며 “뒷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지하로 내려갈 수 있어 통로에서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했다.

달개비의 방들은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회의실로 쓰인다. 연세대 특수대학원 수업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기획재정부·교육부·서울시 등의 공무원들도 종종 회의실로 이용한다. 함 대표는 “서로 관계가 껄끄러운 손님들이 같은 시간에 예약하면 마주치지 않도록 방 위치를 정하곤 한다”며 “손님들이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음식을 내는 직원들도 일이 끝나면 3초 안에 방에서 나오게 교육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유명한 사람일수록 알은체하지 않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아예 관심을 끊는다는 철칙이 일종의 영업 비결”이라고 말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대기업 총수나 금융지주 최고경영자(CEO)들이 즐겨 찾는 이유는 달개비에서 한 말이 새나가지 않기 때문 아니겠냐”며 “기업 인사나 재무 부서들도 비밀 유지가 필요할 때는 달개비에서 회의하곤 한다”고 전했다.

‘현대사의 증인’이었던 세실레스토랑

달개비가 있는 자리에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민주화의 상징’으로 이름났던 세실레스토랑이 있었다. 성공회 대성당 별관 지하에 있던 이 식당은 시위하다 도망쳐 오면 경찰이 쫓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재야인사들이 찾곤 했다. 이 덕분에 세실레스토랑은 현대사의 말 없는 ‘증인’이 됐다. 언론사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식당에선 연일 기자회견이 이어졌다. 1987년 6월 항쟁 때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진보진영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의문이 낭독된 곳도 이곳이다.

민주 정권이 들어선 1990년대 후반부터 세실을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시대에 뒤떨어진 인테리어와 메뉴는 소비자들에게 외면받았다. 경영난을 겪던 세실은 2009년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 2002년 개업해 서울 재동에서 자연음식전문점으로 이름을 날리던 달개비가 들어왔다. 연세대 상남경영원의 호텔 부문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함 대표는 식당을 넘어선 새로운 공간을 만들 때라고 생각했다.

함 대표는 “국제학회나 세미나가 한국에서 자주 열렸는데, 당시에는 작은 회의와 숙박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며 “이전한 뒤 달개비에 ‘콘퍼런스하우스’란 명칭을 붙이고 3년 동안은 1층을 객실 6개인 초미니 호텔로 운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굵직한 정·재계 인사들이 단골

달개비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2012년 대선 때였다. 야권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문재인·안철수 당시 후보의 단독 회동이 이곳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달개비는 ‘닭의장풀’이라는 생명력이 강한 야생화를 뜻한다. 함 대표는 “김수철 씨가 부른 ‘젊은그대’의 노랫말을 지은 소설가 고(故) 안양자 선생이 사람들에게 생명력을 주는 음식을 내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달개비란 이름이 얼마나 예쁘냐”며 이 식당의 이름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후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전·현직 의원 모임의 이름도 달개비가 됐다.

달개비에선 인공 조미료를 일절 쓰지 않는다. 최고의 재료를 찾기 위해 전국은 물론 세계 곳곳을 찾는다는 게 함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청와대에 납품하는 정육점에서 고기를 받아오고 쌀은 전남산 유기농 쌀을 쓴다”며 “최고의 소금을 찾기 위해 파키스탄에 이달 초 다녀왔다”고 말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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