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하겐 못해도 망칠 순 있다"...페이지터너의 고충

입력 2019-06-07 16:58  



(윤정현 문화부 기자) 지난달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9년 만에 내한했습니다.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공연의 2부, 임동혁과 두 대의 피아노로 호흡을 맞춘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Symphonic Dances)’이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연주 초반 가슴이 떨렸습니다. 연주가 아니라 아르헤리치의 악보를 넘기는 페이지터너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넘길 때가 아니라고 아르헤리치가 고개를 흔드는 게 객석에서도 보이는데 페이지터너는 악보를 넘겨 버렸고 아르헤리치는 재빨리 그 다시 그 장을 되돌렸습니다. 그 후엔 페이지터너가 일어설 때마다 조마조마했습니다. 다행히 아르헤리치는 페이지터너가 악보를 넘기려고 일어서면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것으로 ‘이제 넘기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실수는 한번에 그쳤고 곧 다시 연주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페이지터너는 무대 위에 있지만 연주자는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서 연주를 듣지만 관객도 아닙니다. 지난 공연에서 페이지터너의 실수를 보면서 무대 위에 있지만 보이지 않아야 하고 한순간도 집중력을 잃지 않아야 하며 재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움직여야 하는 그들의 고충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페이지터너는 공연계에서 ‘넘돌이’ ‘넘순이’ 등으로 불립니다. 독주회에서는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지만 음표가 많고 복잡한 기교가 필요한 연주나 협연 무대에서는 악보가 필요하고 연주하면서 악보를 넘기긴 쉽지 않아 페이지터너가 함께 합니다.

페이지터너가 지켜야할 공식을 보면 정말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그들은 있지만 없는 듯한 존재가 돼야 합니다. 주로 검정 옷을 입고 장신구 착용도 하지 않습니다. 입장과 퇴장을 할 때는 연주자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악보를 넘길 때 외엔 다른 움직임으로 시선을 끌어서도 안 됩니다. 연주자의 성향을 미리 파악하고 악보를 넘기는 타이밍을 맞춰야 합니다.

앉는 자리는 연주자의 뒷쪽, 왼손으로 악보의 오른쪽 위 모서리를 잡고 넘겨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음악적 지식이 있고 악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해 음악을 전공한 대학원생들이 주로 합니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악보를 넘기는 사람이 연주 전체를 망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계 피아니스트 유자 왕은 악보를 제때 넘겨주지 못한 페이지 터너를 옆눈으로 흘겨보는 동영상을 남기기도 했죠. 그때의 ‘충격’ 때문인지 올 3월 LA필하모닉과 함께 한 서울 협연 무대에서 그는 악보를 아이패드로 보며 연주했습니다. 젊은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유자왕처럼 전자 악보를 보는 연주자도 늘고 있다 합니다.

하지만 ‘사고’는 기계가 더 크게 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에러가 나거나 방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다수의 연주자들은 종이 악보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실제 유자왕의 공연에서 연주에 맞춰 자동으로 넘어가던 악보가 한번에 여러장이 넘어가버려 유자왕이 재빨리 화면을 되돌리기도 했습니다. 실수를 해도 빠르게 만회가 가능한 사람이 아직은 기계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끝) / hit@hankyung.com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