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순간 펼쳐지는 반전…"오레스테스가 살아있어요"

입력 2019-06-21 17:20   수정 2019-06-22 14:03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57) 반전(反轉)




우주의 문법은 질서(秩序)다. 138억 년 전에 빅뱅으로 시간과 공간이 등장하고, 그 안에 생물과 물체가 생겨났다. 우주는 인과응보라는 거대한 원칙의 가감이 없는 표현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란 구절은 삼라만상의 원칙을 알기 쉽게 표현했다. 만물의 생성과 존재에는 분명 그 원인이 있고, 시간이라는 정의가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를 산출한다. 봄에 콩을 심었는데, 가을에 팥을 수확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는데, 분에 넘치는 예상 밖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은 무식하다.

인과(因果)라는 거대한 원칙 안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게임의 법칙’이 숨어 있다. 이 법칙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운명의 여신은 우주 안에서 ‘정의(正義)’를 실현하기 위해 ‘균형’이라는 장치를 뒀다. 예들 들어, 어떤 사람이 분에 넘치는 명예를 지녔다면, 운명의 여신은 그 명예를 앗아가 겸손하게 만든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권력을 소유해 오만해졌다면, 신은 그의 권력을 빼앗아 먼지와 같은 존재로 전락시킨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필요 이상의 돈을 가졌다면, 신은 균형을 잡기 위해 교묘한 방식으로 그의 재산을 빼앗아 그의 마음을 시험한다.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일은 예외가 아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 일을 반전(反轉)이라 한다.

반전(反轉)과 대오(大悟)

반전은 삶의 일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반전을 그리스 비극 작품에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문학 장치로 여겼다. 그는 《시학》에서 비극 작품 구성을 단순과 복잡, 두 가지로 구별한다. 단순한 구성과 복잡한 구성을 구별하는 두 가지 요소가 ‘반전’과 ‘대오(大悟)’다. 반전은 예상할 수 없는 불행의 엄습이며, 대오는 그 불행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깨달음이다. ‘단순한 구성’은 배우나 관객이나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로, 반전과 대오 모두 부족하거나 한 가지가 부족한 이야기다. ‘복잡한 구성’은 반전과 대오를 모두 품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페리페테이아(peripeteia)’란 그리스어를 사용해 반전의 의미를 표현했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반전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환경이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으로 급반전돼 절망적인 상태로 빠져든다. 그의 주위(페리)가 꽉 막혀 그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페테이아).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행위에 대한 재현일 뿐만 아니라 공포와 연민을 불어넣는 사건들의 재현이다’라고 정의했다. 비극을 관람하는 관객들에게 공포와 연민을 자아내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반전이다.

《엘렉트라》에서는 여러 번의 반전이 거듭된다. 엘렉트라는 동생 오레스테스가 아르고스로 돌아와 왕권을 회복하길 바란다. 오레스테스가 왕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와 그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죽여야 한다. 한 노인이 오레스테스의 유골함을 가져와 엘렉트라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아르고스와 자신을 구원할 오레스테스의 죽음은 절망 그 자체다. 바로 이 시점에 첫 번째 반전 드라마가 펼쳐진다.

오레스테스의 생존 소식

무대 위로 엘렉트라의 동생 크뤼소테미스가 달려 나와 엘렉트라에게 말한다. “나는 환희에 차 달려 나왔어요. 언니! 빨리 와야겠다는 생각에 예의도 잊어버렸어요. 언니를 고통과 슬픔에서 구해줄 반가운 소식이에요.”(871~874행) 엘렉트라는 이 세상 어떤 소식도 자신의 고통을 치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체념하며 동생이 어떤 소식을 가져왔는지 묻는다. 동생은 말한다. “오레스테스가 왔어요. 언니가 나를 지금 보는 것만큼 확실해요.”(877~878행) 엘렉트라는 동생이 실성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동생은 조상을 걸고 맹세하며, 오레스테스가 살아서 지금 아르고스 안에 있다고 단언한다. 엘렉트라는 동생이 누군가의 거짓말에 속았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동생은 남들로부터 들은 소문이 아니라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했다고 말한다.

엘렉트라는 동생이 두 눈으로 확인한 사실만 진술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진술을 들어보고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것이다. 크뤼소테미스가 아버지 무덤에 찾아가 봉분 위에 방금 누군가 우유를 헌주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는 ‘누가 헌주했을까’ 궁금하게 여기며 봉분가로 다가갔다. 그곳에서 오레스테스가 아르고스에 왔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저는 무덤에 더 가까이 다가갔어요. 그리고 봉분가에서 갓 자른 머리털 한 타래를 발견했어요. 그것을 보는 순간, 내 마음속에 그리운 모습이 떠올랐어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오레스테스의 증거를 보고 있다고 느꼈어요.”(900~904행) 크뤼소테미스는 그런 제물을 바칠 사람은 자신과 엘렉트라 그리고 오레스테스밖에 없다고 추론한다. 자신과 언니가 이것을 바치지 않았다면, 이 상황에서 머리 타래를 잘라 무덤에 바칠 사람은 오레스테스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믿기지 않는 반전

엘렉트라는 동생의 진술을 믿지 않는다. 동생이 너무 슬픈 나머지 꿈에서 본 것을 착각해 말하고 있다고 꾸짖는다. 오레스테스는 엘렉트라의 마음속에서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엘렉트라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동생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엘렉트라는 말한다. “이 딱한 것아, 그 애는 죽었단다. 그 애가 구해줄 거라고 바라지 마. 그 애를 쳐다보지도 마.”(924~925행) 엘렉트라는 누군가 죽은 오레스테스를 위해 자신의 머리 타래를 올려놓았다고 추측한다.

엘렉트라는 이제 오레스테스의 도움 없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오레스테스에게 의지했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자신의 두 손으로 복수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그리스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명예를 지녀 공적인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는 아르고스 시민들이 칭송하는 노래를 상상하며 이같이 노래한다. “친구들이여, 이 두 자매를 보시오. 이분들은 아버지의 집을 구원했고, 아직 원수들이 기세등등할 때 목숨을 걸고 원수를 갚았습니다. 이분들은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이 두 분은 용감했던 만큼 축제 때와 만인이 모인 곳에서 존경받아 마땅합니다.”(977~982행)

엘렉트라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명성’만이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한다고 확신한다. 인간의 이름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 그러나 도시와 도시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거룩한 행위를 한 자에게 ‘명성’이란 선물이 주어진다. 후대인들의 머리와 입을 통해 오랫동안 회자될 명분만이 인생을 빛나게 한다고 선언한다.

선견지명

아르고스 시민들로 구성된 합창대는 자매의 대화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경우에는 선견지명이 말하는 이에게나 듣는 이에게나 도움이 되지요.”(990~991행) 합창대는 자매로부터 ‘선견지명’을 바란다. 선견지명이란 인생의 오랜 경험을 통해 얻는 혜안이다. 선견지명이란 책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얻은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희로애락을 통해, 인생의 질곡과 역경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지혜다. 선견지명이란 ‘신은 정의롭고 공평하다. 인간이 겪는 행복과 불행은 정의와 균형을 위해 신이 행하는 조절이다’란 사실을 깨닫는 영민함이다.

고대 그리스어 ‘프로메시아(promethia)’는 선견지명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메’는 인간의 마음을 뜻하며, ‘시아’는 우주의 질서에 알맞게 둔다는 의미다. ‘프로’는 ‘어떤 것(사람)을 대신하여’ 혹은 ‘먼저’라는 의미를 가졌다. ‘프로메시아’는 결국 우주의 섭리를 깨달아 자신의 마음을 미리 준비하고 훈련하는 마음가짐이다. 엘렉트라는 동생 크뤼소테미스가 가져온 반전의 소식을 믿지 않는다. 합창대는 이 자매에게 인생이란 무대에는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신비한 일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노래한다. 과연 오레스테스는 살아있는 것일까?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