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에서 배운 '자유'의 가치…아테네 공동체 하나로 묶었다

입력 2019-06-28 17:08   수정 2019-06-29 00:08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58) 자유(自由)




프랑스는 18세기 말 근대국가의 모델을 구축했다. 그 모델은 그 후에 등장하는 국가의 기본이 됐다. 프랑스 혁명은 세 가지 가치를 근간으로 전개됐다. 이 세 가지 가치는 프랑스라는 국가의 설계도이자 기둥이다. 프랑스라는 국가는 이 보이지 않는 가치들의 가시적인 표현이다. 정교한 가치를 소유하지 않은 집단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첫 번째 가치는 ‘자유(自由)’다. 자유는 개인이 타인의 구속을 받지 않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개인들이 추구하는 자유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다. 자유라는 개념의 기본은 이것이다. 개인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저해하는 행위는 그(녀)에 대한 자유의 침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사회악이다. 근대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法)’을 제정함으로써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발휘되는 장치를 마련했다.

‘자유 - 평등 - 공동체 의식’

두 번째 가치는 ‘평등(平等)’이다. 평등이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지닌다는 사상이다. 개인의 성, 계급, 출신, 인종, 건강 상태, 종교 등 그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연적이며 환경적인 요인들이, 그를 차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만일 내가 아마존 밀림지대 문명이 닿지 않는 오지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그곳의 문화와 문명의 세례를 받아 일정한 종교관과 세계관을 지닐 것이다. 만일 문명세계에서 온 타인이, 내 종교와 문화를 폄하하고 수정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나’라는 독립적인 인간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해치려는 무식한 행위다.

평등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다. 다양성이란 자신과는 다른 세계관을 지닌 타인의 다름에 대한 칭찬이다. 그래야 상대방도 나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다름을 회피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성숙된 마음이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상충되는 개념 같지만 그렇지 않다. 프랑스 혁명의 세 번째 가치인 ‘공동체의식’에서 이 가치들이 조우하면서 공동체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한다. 그 문제들은 한순간에 해결(解決)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해소(解消)된다. 해결은 성급하지만 해소는 시간이 걸린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세상을 응시할 수 있도록 반대로 상대방이 내 입장에서 세상을 관조할 수 있도록 대화를 시도하고 인내하고 자신의 주장을 절제하면서 쌍방 간의 첨예한 주장은 서서히 실마리를 찾는다. 이들은 한배를 탄 운명공동체로, 타인의 다름을 인정할 수 없다면 나의 다름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는 비극 《엘렉트라》에서 당시 아테네 시민에게 이 세 가지 가치를 함양시킨다. 아테네 시민들은 저녁노을 아래 아테네 야외극장에 좌정해 가족을 넘어선 인위적인 공동체인 ‘아테네’를 하나로 묶는 ‘자유’라는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무대 위를 바라봤다.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의 조우

무대 위에 오레스테스와 그의 가정교사 필라데스가 등장했다. 그의 두 하인은 유골단지를 들고 뒤따라온다. 엘렉트라는 여동생 크뤼소테미스로부터 남동생 오레스테스가 살아있다는 ‘반전’의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아이기스토스와 클리템네스트라의 친구인 스트로피오스의 부탁을 받아 그녀를 찾아온 전령인 척한다.

오레스테스는 앞에 서 있는 여인이 누이인 엘렉트라인 줄 모르고, 그녀에게 유골함을 지칭해 말한다. “우리는 이 작은 단지에 돌아가신 그분의 한 줌 유골을 담아가지고 왔습니다.” 오레스테스는 이 단지에 자기 자신의 유골이 담겨져 있다고 거짓말한다. 그가 이런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정의의 신이며 법의 신인 아폴로의 명령 때문이다. 아폴로는 오레스테스에게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아르고스로 잠입해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와 그의 정부를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그 행위는 도시라는 공동체의 법을 지탱하는 정의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남동생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품은 엘렉트라는 한없는 절망과 슬픔에 빠진다.

‘공포와 연민’

이 장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그리스 비극의 정의와 효과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행위를 동반한) 연습의 재현(再現)’이라고 정의했다. 엘렉트라가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고통은 단순한 상상력이 아니라 실재다. 그녀의 슬픔은 그녀의 심장을 도려낼 정도로 ‘심각(深刻)’하고, 압도적이며, 완벽하다. 관객들은 엘렉트라가 처한 비참한 상황을 상상하며 두 가지 감정인 ‘공포(恐怖)’와 ‘연민(憐憫)’에 휩싸인다. 관객들은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가 처한 출구가 없어 보이는 비극적인 상황에 경악한다. 그들의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는 자신들에게 생명을 준 어머니지만 아테네라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도시의 법, 아폴론 신이 아르고스를 지탱하기 위한 도시법을 준수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런 운명에 처한 남매를 보고 한없는 연민을 느꼈다. 인간은 가족이라는 최소공동체에서 신뢰와 사랑이란 가치를 배우고 연마한다. 그 배움은 가족 구성원이 도시라는 커다란 인위적 공동체의 일원이 됐을 때 개인들이 지녀야 하는 시민들의 기본 양식이기 때문이다.

엘렉트라의 애가

오레스테스가 건넨 유골함을 받은 엘렉트라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백미로 꼽히는 슬픈 노래를 부른다. “아아, 내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이의 기념물이여! 오레스테스 영혼의 유일한 잔재여! 내가 너를 보낼 때 품은 희망과는 정반대로, 나는 너를 지금 맞이하고 있구나! 오늘 나는 너를 한 줌의 흙으로 들고 있구나!”(1126~1128행) 엘렉트라는 자신이 어떻게 이런 동생 오레스테스를 키웠는지를 나열한다. 아르고스의 여인들로 구성된 합창대는 엘렉트라의 슬픔이 지나치다고 지적한다. “엘렉트라여!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자녀다. 오레스테스도 인간이다. 그러므로 너무 슬퍼하지 말라. 죽음은 우리가 모두 지불해야 하는 빚이다.” 인간은 신과 달리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있다. 소포클레스는 죽음을 인간이 반드시 갚아야 하는 빚이라고 정의한다.

엘렉트라는 가족이라면 반드시 느껴야 할 슬픔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했다. 그녀의 노래는 숭고한 딸이자 누이로서 품어야 할 직계가족에 대한 존경심을 담고 있다. 그녀는 남동생의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 자신의 슬픈 심정을 이렇게 드러낸다. “아아, 슬프고 슬프도다. 가엾은 모습, 아아, 아아. 아아, 슬프도다. 가장 끔찍한 길로 보내져 더없이 그리운 이여! 네가 나를 죽였구나!”(1160~1163행)

오레스테스의 정체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마치 엘렉트라 자신의 죽음처럼 슬퍼하는 누이 엘렉트라를 보고,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말한다. “그건 오레스테스의 유골이 아니요. 꾸며낸 이야기입니다.”(1217행) 엘렉트라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오레스테스는 엘렉트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증거물을 보여준다. 그들의 아버지 아가멤논이 오레스테스에게 준 인장반지다. 그러자 엘렉트라는 오레스테스를 부둥켜안고 기뻐하며 외친다. “오오, 나의 씨앗이여! 내가 가장 사랑하던 분(아가멤논)의 씨앗이여! 네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그리고 너는 네가 그리워하던 누이를 이렇게 보고 있구나!”(1232~1235행)

이 두 남매는 아르고스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단위로는 상상할 수 없는 정의를 실현해야 했다. 그들의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는 오레스테스의 유골을 확인하려고 방으로 들어갔으나 오레스테스와 마주치고는 경악한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 어미를 불쌍히 여겨다오!” 오레스테스는 이런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살해한다.

마침내 아르고스의 왕인 아이기스토스가 원정에서 돌아온다. 그는 오레스테스의 시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얼굴을 확인할 참이다. 그가 시신을 덮은 하얀 천을 걷어내자 그 시신은 오레스테스가 아니라 그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였다. 오레스테스는 아이기스토스에게 말한다. “법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모든 자에게 이런 죽음의 벌이 당장 집행돼야 한다. 그러면 나쁜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 것이다.”(1505~1507행)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는 아이기스토스를 앞세우고 궁전 안으로 들어간다. 아르고스 합창대는 이들을 보면서 노래한다. “오오, 아트레우스의 자손들이여, 그대들은 수많은 시련 끝에 힘겹게 오늘의 사건을 통해 자유에 도달했습니다.”(1508~1510행) 자유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며, 도시라는 공동체가 생존하기 위한 생명줄이다.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