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어떤 '克日'을 하려는가

입력 2019-07-24 17:36  

중국의 희토류 수출제한 압박
대체기술로 '뒤집기'한 일본

소재·부품 '압도적 우위' 일본
경제보복 이번이 시작일 수도
'필살기' 키우게 할 환경 시급

이학영 논설실장



[ 이학영 기자 ] 반도체가 한국 경제 버팀목으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은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눈물겹다. 1982년 이병철 삼성 회장은 일본이 석권하고 있던 반도체산업에 도전할 결심을 굳히고 친분이 있던 일본 기업들에 도움을 요청했다. 도시바 히타치 NEC 등 선두기업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B급 기업’이던 샤프로부터 산업연수생을 받아주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생산라인에서 ‘시다바리(조수)’로 일본인 직원들이 시키는 일만 해야 할 뿐, 어떤 질문이나 메모도 해서는 안 됐다.

이 회장은 이런 자리에 일류 공과대학을 졸업한 최정예 인재들을 보냈다. 연수생들은 매일 새벽 출근해 공장 바닥과 생산기계를 깨끗이 청소한 뒤 밤늦게까지 샤프의 고졸 기능공들이 시키는 허드렛일만 했다. 어깨너머로 공정 처리 과정을 훔쳐보고는 화장실로 달려가 몰래 메모지에 적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주요 설비의 길이는 발걸음 수로 어림셈을 했다. 연수생들은 퇴근한 뒤 눈대중한 것들을 토론하며 천신만고 끝에 ‘D램 제조기술 노트’를 완성했다. 오늘날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세계 최정상에 올라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지만, 태동 과정은 이렇게 절박하고 비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엊그제 청와대 참모회의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산업 분야에서 일본의 절대 우위를 하나씩 극복하고 추월해왔다”며 반도체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도 했다. 맞는 말이다. 아무런 기술도 없이 ‘해보자’는 투지 하나만으로 불가능해 보이던 과제에 도전해 이뤄내온 것이 한국 기업과 산업의 역사다.

그런 기업들이 일본의 기술보복이라는 또 하나의 큰 장벽을 만났다. 대통령은 “지금의 어려움을 기회로 삼아 국가 차원의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대통령 측근은 일본 기업들이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 당시 중국의 자원보복을 이겨낸 사례를 들며 기업들을 응원했다. “2011년 분쟁이 촉발하자 중국 정부가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제한했다. 처음에는 일본이 굉장한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3년 뒤 중국의 희토류 기업 절반이 죽었다.” 희토류를 전기·전자 부품 소재로 쓰던 일본 기업들이 이를 악물고 대체기술 개발에 매달린 결과였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6개월 내에 될 일인지 1년, 5년, 10년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가야 한다.”

정부는 나름의 기업 지원 조치를 내놓기 시작했다. 일본이 수출제한 조치를 취한 에칭가스 등 3개 화학소재 품목의 연구개발 업무에 대해선 근로시간을 제한하지 않기로 했다. 일본 의존도가 높은 소재와 부품의 국산화 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긴급 추가경정예산 편성안도 내놨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우리 기업들이 이 정도 지원만으로 중국 정부의 희토류 공격을 ‘엎어치기’로 메다꽂은 일본 기업들의 저력을 따를 수 있을까. 일본 기업에 가서 굴욕을 인내하며 ‘반도체 신화’를 일궈낸 선배들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는 게 기업들의 토로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제한 조치를 3개 화학소재에 그치지 않고, 수백 가지 품목으로 확대하겠다고 예고한 상황이다. 일본이 내놓는 규제 리스트에 맞춰 그때그때 대응해나가는 식으로는 ‘끌려다니는 게임’을 면하기 어렵다. 잊고 있던 ‘죽창가’를 다시 부르고, 이순신 장군의 ‘열두 척의 배’를 떠올린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지금의 굴욕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훈을 제대로 새겨야 한다. 우리도 공급 중단 여부에 따라 일본 산업의 판을 흔들 수 있는 독보적이고 핵심적인 기술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슷한 일이 또 생기더라도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러려면 기업들이 마음껏 새로운 분야를 탐색하고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무슨 분야든 ‘원칙 금지, 예외 허용’의 철통 규제 장벽을 쌓아놓고 임시변통으로 규제를 풀어주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 기업가들이 마음껏 야성(野性)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혁신성장’만이라도 제대로 전열을 추슬러서 속도를 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극일(克日)’의 길을 열어나갈 수 있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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