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이인호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30년 한우물 판 '산업부 맨'…트럼프 당선 직후 장관회담 끌어내

입력 2019-12-20 17:50   수정 2019-12-21 00:42


무역인들에게 2019년은 잊지 못할 해다. 미·중 무역분쟁에 일본 수출규제까지 더해지면서 1년 내내 수출이 고개를 들지 못해서다. 올 1월 취임한 이인호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57)은 그 한복판에 있었다. 무보는 보험·보증을 지원하며 수출기업들과 위험 부담을 나누는 공적 금융기관이다.

이달 초 서울 재동에 자리잡은 한정식집 ‘한뫼촌’에서 이 사장을 만났다. 당일 낮 ‘2019 무역의 날’ 기념식을 찾았다는 그는 “행사장에 모인 무역인들이 ‘올해는 그야말로 도전의 시기였다’고 입을 모으더라”며 “현안이 워낙 많다보니 한 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고 회고했다.

30년 한우물 판 산업통상 전문가

이 사장이 식당에 들어서자 안내를 맡은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북촌에 있는 한뫼촌은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야 만날 수 있다. ‘어떻게 숨은 맛집을 알게 됐느냐’고 물으니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시절 청와대 사람들과 회의를 마친 뒤 이곳을 자주 찾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청와대 사람들 사이에선 소문난 맛집”이라고도 했다.

상공부에서 사무관 생활을 시작한 이 사장은 작년 말 산업부 차관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 넘게 한우물만 팠다. 오랜 기간 동고동락한 산업부 공무원들은 지금도 그를 ‘인호 형’으로 부른다.

다른 고위 공무원에 비해 관료를 꿈꾼 시점은 늦었다. 이 사장은 “부모님이 모두 교사였다”며 “그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에는 교사나 교수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북촌은 그가 초등학교를 다닌 곳이다.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로 화제가 돌아갔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삼청동으로 이사했다”며 “청와대 춘추관으로 올라가는 길가에서 친구들과 야구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북한에서 자란 아버지는 38선 경계가 지금처럼 삼엄하지 않았을 때 잠깐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며 “고학 끝에 교사가 됐고 특수학교 교장도 맡았다”고 했다.

어느새 상에는 더덕구이와 문어숙회, 홍어찜이 올라왔다. 고추장 양념을 입혀 구워낸 더덕구이를 베어물자 쌉싸름한 향이 입맛을 돋웠다.

음반 제의 받은 통기타 실력자

서울 광성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 진학한 뒤에도 뚜렷한 진로를 정하지 못했다. 이 사장은 “경제학 전공은 적성에 맞았는데 유학 갈 형편은 안 됐고 장학금을 받을 만큼 학점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며 “앞으로 뭘 하고 살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다.

관료가 된 건 우연에 가까웠다. 이 사장은 “신촌에서 술을 마시는데 친구가 조만간 행정고시 원서를 낼 거라고 하더라”며 “그 얘기를 듣고 ‘행시가 뭐냐’고 물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공직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친구를 따라 행시를 봤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이후 세 차례 더 도전하면서 관료가 되겠다는 목표를 다잡았다. 이 사장은 “행시 재경직을 준비하면서 경제부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다”며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데다 나라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 잡고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상에 통들깨가지찜이 나왔다. 이 사장은 “한뫼촌에 올 때마다 즐겨 찾는 음식”이라며 “평범해 보이지만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고 했다. 달큼한 양념에 부드러운 가지의 식감이 잘 어우러졌다.

이 사장은 “공무원이 안 됐다면 전업 가수로 데뷔했을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행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동교동의 ‘힐스트리트 블루스’라는 카페에서 무대에 올랐다. 제법 이름 있는 통기타 듀엣 ‘둘다섯’의 멤버가 운영하는 카페였다. 1주일에 두세 번 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이 사장의 무대를 지켜본 라디오 프로그램 ‘2시의 데이트’의 김광한 DJ가 음반 발매를 제의했다. 이 사장은 “무대 첫 순서로 만화영화 ‘개구리 왕눈이’의 주제가를 편곡해서 부르곤 했다”며 “나중에는 ‘개구리 소년!’을 함께 외치는 팬도 생겼다”고 했다.

이 사장은 공직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하는 걸 즐겼다. 산업부 공무원들의 합창단인 ‘울림’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얼마 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 진로 고민이 많다는 학생에게 ‘그 나이 땐 진로가 막막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며 “지금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자신에게 맞는 길이 나온다고 얘기해줬다”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 직후 끌어낸 첫 장관회담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 사장이 막걸리를 권했다. 매콤달콤한 홍어무침과 잘 어울렸다. 술잔이 한 순배 돌자 산업부 공무원 시절 얘기를 꺼냈다.

이 사장은 산업부에서 무역투자실장, 통상차관보 등을 지내면서 통상 전문가로 통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때 고생했던 생각이 제일 많이 난다”며 “대선 개표 실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건 난생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되자 설 연휴를 반납하고 미국 워싱턴DC로 날아갔다. 우리 산업부 장관과 미국 상무장관 간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윌버 로스 신임 상무장관이 외국 장관과 처음 한 양자 협상이 한·미 산업장관 회담이었다. 이 사장은 “협상을 준비하던 3박4일 동안 한숨도 못 잤다”며 “통역하는 시간을 아끼려고 혼자서 밤새워 영어 대화를 준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차관으로 임명된 뒤에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첫 한·미 정상회담 대표단 자격으로 백악관을 방문했다. 당시 산업부 장관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그가 로스 장관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공식 회담을 진행했다. 이 사장은 “이때가 공직생활 중 제일 고됐지만 최고로 보람있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수출시장·품목 다변화 지속 추진”

이 사장은 올해 1월 무보 사장에 취임한 뒤 녹록지 않은 해를 보냈다. 작년 말부터 12개월 연속 수출이 역성장했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분쟁에 일본 수출규제가 더해진 결과였다.

하지만 내년 상반기에는 수출 상황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 사장은 “내년 2월께부터 수출 실적이 다시 플러스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며 “정부와 함께 수출을 늘리는 데 모든 힘을 쏟을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무보는 내년에도 수출 시장을 넓히고 수출 품목을 늘리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이 사장은 “대외 환경이 불투명한 상황에선 중소·중견기업이 잘 버틸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게 중요하다”며 “글로벌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든든하게 금융 지원을 해주는 게 무보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대중국 수출 의존도가 매우 높고 수출 품목도 전자와 자동차 등에 치우쳐 있다”고 우려했다. 산업부에 따르면 올해 1~11월 한국 전체 수출의 25%를 대중 수출이 차지했다. 품목별로는 반도체가 전체 수출의 17%를 맡았다.

이 사장은 “수출 시장과 품목 다변화는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장기 과제”라며 “수출 강국인 우리나라가 안정적인 수출 포트폴리오를 갖출 수 있도록 착실하게 씨를 뿌리겠다”고 했다.

■ 한국무역보험공사는

1992년 7월 출범한 한국무역보험공사는 무역보험 제도를 전담 운영하는 수출신용기관이다. 무역보험으로 한국 수출기업의 대외 위험을 완충하는 ‘에어백’ 역할을 하고 있다.

무보는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비상 상황 때마다 무역보험을 통해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기관이 올 들어 지난달까지 기업에 지원한 무역금융은 총 143조3000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136조1000억원) 대비 7조2000억원 늘었다.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지원도 강화하고 있다. 신용도가 낮아 수출 확대에 애로를 겪는 기업을 돕자는 취지다. 올해 1~11월 중소·중견기업 수출보증 실적은 53조7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정부의 신남방, 신북방 정책에 발맞춰 신시장 관련 수출 지원에도 올해 총 37조2000억원을 투입했다.

■ 이인호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약력

△1962년 서울 출생
△1980년 광성고(서울) 졸업
△1984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 198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정책학 석사
△ 1999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행정학 석사
△1987년 행정고시 31회
△2012년 지식경제부 정책기획관
△2015년 산업통상자원부 무역투자실장
△2017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2019년 1월~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이인호 사장의 단골집 한뫼촌

무용가 최승희 생가 터에 자리…달큼한 들깨가지찜 인기

서울 재동에 있는 한정식집 한뫼촌은 ‘북촌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맛집이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둔 헌법재판소 직원은 물론 청와대 직원들도 자주 찾는다.

옻칠한 목기와 도자기에 채식 위주의 음식을 깔끔하게 담아내 외국인 손님에게 한식을 소개하기에도 제격이다.

초행길엔 입구를 찾기 쉽지 않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한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중정 한편에 장독대가 놓인 소담한 한옥이다. 한뫼촌 자리는 1930년대 당대 최고의 무용가였던 최승희 씨가 태어나 자란 집터다.

지서윤 사장은 대표 음식으로 들깨가지찜을 꼽았다. 달큼한 맛에다 부드러운 식감 덕분에 가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즐겨 찾는다는 설명이다. 통들깨를 올려 씹는 재미도 살렸다.

더덕 본연의 향이 살아 있는 더덕구이, 시원하면서 담백한 맛이 일품인 홍어찜도 인기다.

모든 음식에 간을 많이 하지 않는다. 덕분에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 있다는 평가다. 소금은 신안 토판염만 고집한다. 고추장 된장 간장 등 장류는 강원도 인제에서 장을 직접 담그는 친지에게서 받은 것만 쓴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상차림을 달리한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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