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윤한, 엄친아 이상의 슈퍼유전자 "6개월 만에 버클리 합격은…"①

입력 2013-09-24 12:00   수정 2013-09-24 12:01


[윤혜영 기자] 엄친아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적어도 우리 엄마 친구에게는 이 정도의 아들은 없었던 것 같다. 184cm의 훤칠한 키에 훈훈한 외모는 물론이고 학창시절 전교 3등 밖으론 넘어간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총 12년간 한 해도 놓치지 않고 반장-부반장을 역임했으며 학교에서 아이큐도 제일 높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형은 의사고 자신도 자연스럽게 그런 길을 걸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음악이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마음먹고는 6개월 만에 이름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버클리 음악대학에 합격했다. 자, 이제는 조금 납득이 가는가? 속된 말로 신은 이 사람에게 유전자를 몰빵해준 게 분명하다.

위 설명에 부합하는 주인공은 최근 MBC '우리 결혼했어요' 합류로 포털사이트 검색어를 휩쓴 피아니스트 윤한이다. 콘서트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그를 만난 곳은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한 연습실. 모자를 쓰고 평범한 티를 입고 조우할 때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다. 하지만 얘기를 나누면서 깨달았다. 그는 예상을 뛰어넘는 다른 세계의 인물이었다.


◆ 망언의 향연? 그냥 타고난 게 이런 건데…
6개월 만에 버클리 음대 합격이라니 음악을 전공해보지 않아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해 보였다. 공부만 하던 소년의 갑작스러워 보이는 음대 합격소식, 음악성이 타고난 것일까?

"겉으로 보이는 건 그렇지만 속으론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겠어요. 저는 버클리 음대가 유일한 선택이었거든요. '이게 안 되면 딴 데 가야지' 이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 학교에 맞춰서 레슨을 받아서 들어간 거 같고 또 우리나라 실용음악과는 입시 경쟁률이 엄청나잖아요. 50:1, 100:1 이러니까 얼마나 잘하는 애들이 많겠어요. 근데 미국은 안 그래요. 잘하는 사람 뽑는 게 아니라 '가르치면 뭔가 되겠다' 그런 잠재력 있는 사람을 뽑거든요. 못했지만 그런 잠재력이 있었나 봐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소질이 남달라서 부모님의 반대 끝에 피아노를 하게 된 조금은 예상 가능한 흔한 스토리가 아니었다. 그의 얘기를 듣는 순간, 예술계의 '족집게 과외'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모님이 지원을 많이 해주셨죠. 부모님이 소위 말하는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오신 분들이에요. 그러니까 자식들도 그렇게 시켜야겠는데 첫째는 의대를 가서 의사가 됐고 이과였던 둘째도 공부를 잘했는데 갑자기 음악을 하겠다는 거예요. 하고 싶다는데 시켜야죠. 대신 조건이 있었어요. '음악 할거면 세계 최고의 학교에 가고 대학원, 박사까지 다 따라' 그렇게 된 거죠."

그렇게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는 그저 '그냥 가는구나'했다고. 뜻밖에 무덤덤한 대답과 함께 그는 "아티스트라기보다는 회사원 같은 스타일이다. 굉장히 이성적이고 감정변화도 심하지 않고 현실주의자다"라며 허허 웃었다.

한참 얘기를 들었지만 '도대체 왜 갑자기 음악을 한 거지?'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이에 그는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외모랑 키 변화가 심하게 왔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옷 입는 걸 신경 쓰게 됐다. 놀러 다니다 보니까 길거리 캐스팅도 많이 됐는데 그때는 무작정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모님이 할 거면 제대로 뭐라도 해라. 그래서 그럼 '음악 할래요' 이렇게 된 거였다. 유별나다는 강남 8학군 대치동 학원가 출신이다. 꿈도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시키는 걸 그냥 했다. 놀 줄도 모르고 공부만 했다"며 평범했던 학창시절에 대해 회상했다.


◆ 버클리에서의 생활
그렇게 정석대로 살던 윤한은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보냈다. 세계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인 만큼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오히려 그는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라틴음악도 듣고 스윙도 듣고 힙합도 들으면서 경쟁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타지생활인만큼 "고생스러운 시기도 있었다"고 전했다.

"저는 워낙 사회적인 동물이라 되게 빨리 친해질 수 있었는데 초반 1년 동안은 되게 힘들게 살았어요. 부모님이 경험해보라고 일부러 그렇게 하신 거죠. 핸드폰도, 차도 없었고 침대, TV, 책상도 없는 작은 방에 매트리스만 놓고 룸메이트랑 둘이 살았거든요. 몇백 년 된 건물인데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이었고 밥도 맨날 집에서 해먹었어요. 김치에 3분 카레 이런 거 있잖아요. 쇼핑도 해본 기억이 없네요. 한 달에 10만 원도 안 썼을 걸요?"

그런데 1년 후 갑자기 모든 것이 확 업그레이드됐다. 부모님의 걱정을 사게 할 만한 대형사건이 벌어진 것.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다행히 수업을 가고 집에 없었기 때문에 무사했는데 미국은 총도 많잖아요. 그 얘기를 부모님한테 했더니 놀래시면서 '안전한 곳으로 옮기자'해서 1층 로비도 있고 경비 아저씨도 있고 옥상에 수영장도 있는 다운타운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로 이사했죠."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어딘지 모를 괴리감이 느껴진 게 사실이었다.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 그리고 공부 외모 예술능력 운동 등 뭐하나 빠지지 않는 훌륭한 조건까지 도대체 이 사람에게 인생에 실패가 있었을까 싶었다.

그는 "실패라는 것도 기준이 다르고 실패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가다가 넘어지면 '아 이렇게 하면 넘어지는구나. 깨달았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사실 나도 많이 까이고 넘어져 봤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였을까. 이 물음에 그는 "기억이 안 난다"며 "가장 좋았던 때는 기억난다"고 신나게 말을 이었다.

"19살에서 20살이 넘어가던 때 미국에 처음 가서 6개월간 언어연수를 받았는데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죠. 연습 이런 걸 다 떠나서 언어연수만 하면 되잖아요. 우리나라 학원 이런 걸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정말 자유롭거든요. 잔디밭 있고 사슴 뛰어다니는 동네인데 안전하고 날씨도 사시사철 거의 봄가을 날씨예요. 수영장도 있고 캠퍼스도 너무 아름다웠죠. 그때 2002 한일 월드컵 시즌이었는데 친구들과 축구하고 응원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잔디밭에서 책 읽다 잠들고 이런 생활들 있잖아요. 행복했어요."

수업 역시 리딩 수업은 영어로 된 만화책을 읽는 것이었고 리스닝은 영어로 된 영화를 자막 없이 보기, 스피킹은 옆에 앉은 애들과 노는 거였다고. 윤한은 그 시기를 학업도, 피아노도 떨어진 곳에서 먹고 살 걱정 없이 살았던 행복한 시기였다고 떠올렸다. (사진제공: 스톰프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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