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통일전쟁 뛰어든 후백제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06-21 08:00  


남북이 분단되고 전쟁을 벌였다. 아직도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지 못했다. 통일은 실제로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역사적으로 통일을 지향해 왔을까? 고대를 돌아보면 신라가 주도한 소위 ‘삼국통일’은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외세를 지나치게 끌어들였고, 발해의 부활로 남북으로 재분단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또한 그 폐해가 역사적으로 계승돼 지역갈등이라는 또 다른 분열을 재생산하는 구실을 줬다.

신라의 분열과 해양세력들의 등장

신라는 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떨어지고, 지방을 통제하는 기능을 상실해갔다. 또한 거듭되는 실정과 계속되는 흉년으로 경제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권력 쟁탈전에서 소외당한 세력들은 재야세력으로 힘을 기르고, 지방에서 태동한 자생적인 호족세력들이 발호했다. 특히 해안지방에는 상업을 바탕으로 한 경제력과 강한 군사력을 갖춘 군소 해양세력들이 빠르게 성장했다.

훗날 경기만의 강화도 일대를 기반으로 성장한 왕건과 그의 동맹이 된 김포·풍덕·파주·인천·안산·남양(화성시)·평택·당진·나주 등의 해양세력들이 있었다. 금강 세력인 견훤과 우군인 섬진강 하구(순천) 세력, 그리고 동해중부의 명주(강릉) 세력 등도 있었다. 그 밖에 전라도 압해현의 ‘능창’처럼 지방해적들도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장보고의 잔여세력들은 대부분이 벽골제로 강제이주를 당했지만, 일부는 일본 및 중국으로 망명했고, 해적으로도 변신했을 것이다.

이 무렵 신라 해적들이 활동을 재개해서 일본의 공물선들을 약탈했고, 큐슈 북부 해안과 대마도를 몇 차례 공격해서 동아지중해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처럼 신라 하대는 해양호족들이 우후죽순처럼 대거 등장하고, 신라사회의 해체와 새로운 통일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해군력을 동원한 전쟁이 벌어졌다 (윤명철, 《한국해양사》)

견훤의 후백제 건국

이 시대 가장 강력한 해양세력은 견훤(甄萱)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경상도 상주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이씨였으며, 신라의 중앙군으로 출발해 서남해에서 해양방어를 맡은 군인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불만과 옛 백제땅이라는 민심을 활용해 달포 사이에 규모가 5000여 명에 달했다. 892년에는 자신을 왕이라 칭하면서 ‘후백제’를 건국했고, 900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에 후삼국 통일전쟁에 뛰어들었다.

후백제는 927년에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침공해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웠으며, 고려와 벌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세력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930년 고려와 고창(안동) 전투에서 대패했다. 또 934년에는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빼앗겼다. 그 후 주도권을 상실하고, 왕실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해 935년에 견훤은 고려의 왕건에게 귀순했고,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결국 1년 후인 936년에 고려의 10만 대군과 벌인 낙동강 상류(구미 지역)전투에서 대패한 후에 멸망했다.

경상도 산골 출신의 하급군인이 후백제를 건국하고 발전시킨 힘과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견훤은 야망이 컸고, 지도력과 군사작전 능력이 탁월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해서 민심을 이용할 줄 알았고, 의자왕의 복수와 백제의 계승이라는 지역의 정체성과 갈등을 이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양활동능력을 보유하고, 적합한 지역을 수도로 선정한 일이었다.

후백제 수군과 고려 수군의 서해 해전들

수도인 전주의 배후이면서 외국과 교류하는데 적합한 장소는 영산강 하구지역이었다. 견훤은 901년에 대야성공격이 실패한 후에 금성(나주)의 남쪽을 공격했다. 그러자 903년에 후고구려의 궁예는 젊은 강화만 해양세력인 왕건(해군대장)을 파견하여 영산강 하구를 급습해서 금성군과 주변의 10여 군현을 빼앗아 ‘나주’로 이름을 바꿨다. 궁예는 909년에 왕건을 나주에 다시 파병했고, 이때 오월국에 파견하는 후백제의 사신선을 나포하고, 진도와 고이도 등을 점령하였다. 또 910년에는 견훤이 나주성을 포위하자 수군을 파견했고, 914년에는 왕건을 시중직에서 해임한 후에 나주로 내려보냈다. 이렇게 벌어진 영산강 하구 쟁탈전은 결국 후백제의 패배로 끝났다.

그후 한동안 후백제는 특별한 해군활동이 없었는데, 932년에 들어서자 돌연 활발해졌다. 9월에 수군으로 고려의 핵심인 예성강에 침입해 지금 NLL(북방한계선) 일대인 연안·배천·정주의 선박을 100척이나 불사르고, 근처인 저산도의 말 300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다시 10월에는 해장군인 상애(尙哀)를 보내 공략했다. 후백제 수군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왕건은 6년간 해로가 막혔다고 한탄했다. 삼국유사의 거타지조에는 신라가 아찬인 양패를 중국에 보냈는데, 백제(후백제)의 해적이 진도(津島)에서 가로막는다는 소문을 듣고 궁사 50명을 뽑아서 따르게 했다. 배가 혹도(백령도)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크게 일어나 십 여 일 동안 머무르게 됐다는 내용이 있다.

후백제의 국제관계와 이용항로

후백제는 해양능력을 국제관계에 최대한 활용했다. 10세기에 들어와 중국은 남쪽의 오월국, 북쪽의 후당, 거란 등으로 분열돼 적대관계를 맺었고, 후삼국 또한 적대관계인 상황 속에서 국제관계는 매우 복잡해졌다. 각 국가들은 해양을 이용해 긴박한 외교와 무역을 벌였고, 심지어는 해상제어와 봉쇄까지 실행했다. 후백제는 896년에 절강성 지역인 오월국에 사신을 보냈고, 909년에도 사신을 파견했지만, 광주의 염해현 부근에서 후고구려의 수군에게 나포됐다. 918년에는 사신과 함께 말을 보냈고, 반대로 927년에는 오월국에서 사신을 파견했다. 925년에는 산동지역에 있었던 후당과 교섭했고, 거란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무역을 벌였다. 일본과도 교섭해 사신을 대마도에 보냈는데, 이는 신라를 압박하고, 무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929년에는 대마도에 표류한 상선을 도수가 돌려보내자, 사신을 보내 답례했다.

그렇다면 후백제는 어떤 항로를 이용하여 국제적으로 활동했을까? 많이 사용한 항로는 동진강 만경강 금강의 하구와 변산반도 해안을 출항해 곧장 바다로 나가 사선으로 청도만이나 산동반도 남단의 여러지역에 도착하는 또 다른 황해중부 횡단항로이다. 《대동지지》에 따르면 위도(부안 앞바다)에서 바람을 이용해 배를 띄우면 중국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필자는 2003년에 뗏목 '장보고호'을 타고 이 항로를 무리없이 재현했다. 또한 경기만과 일부 남부지방의 여러 항구를 출항해서 백령도를 경유해 산동반도의 여러 지역에 도착하는 항로도 사용했다. 또 군산·김제·부안·영광·해남· 강진 등 전라도의 해안을 출항해 사단으로 항해한 후에 강소성과 오월국의 수도인 영파 및 항주만 등의 해안으로 도착하는 황해남부와 동중국해 사단항로를 사용했는데, 이미 신라의 승려, 상인, 사신, 유학생 등 활용하던 항로였다. 그리고 남해의 서부해역을 출항해 대마도를 경유하거나 통과물표로 삼으면서 큐슈북부에 도착하는 남해항로를 사용했다.

후백제의 수도인 전주는 내륙 항구도시

이러한 항로의 중심에 전주가 있었다. 전북 해안지역은 고대에 남북을 연결하는 항로의 중계지 역할을 했고, 황해를 건너온 중국 남방문화가 유입되는 입구였다. 변산반도의 죽막동 유적에서 발굴된 중국계, 왜계의 유물들은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동진강을 통해서 정읍·김제·고창 등 평야지대로 쉽게 연결되고, 군산지역을 통해서는 금강 하구로 연결된 하계망을 이용해서 전북과 충남 일대의 깊숙한 곳까지 교통이 가능하다. 백제 등이 사용했던 만경강은 ‘한천(漢川)’을 통해서 전주 시내까지 연결된다. 전주는 이른바 해륙교통과 수륙교통의 합류점이었고, 해양능력의 중요성을 간파한 견훤은 전주의 이점을 파악하고 수도로 택한 것이다(윤명철 《해양역사상과 항구도시들》). 그런데 놀랍게도 전주사람들은 전주가 40년 가까이 후백제의 수도였으며, 사신선들이 발착했던 국제적인 항구도시였던 사실을 모른다.

정체성이 부족하면 집단은 자체 분열하고, 외부 집단과 경쟁을 벌일 때는 쉽게 파멸한다. 때문에 정체성을 찾고, 왜곡을 바로 잡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지역갈등처럼 손쉽게 악용돼서 집단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후백제’의 등장과 발전은 우리 역사의 분열을 심화시킨 것일까, 아니면 통일을 위한 토대를 놓은 것일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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