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대중의 선호가 도덕이 되면 중우정치(衆愚政治) 우려 커"

입력 2020-07-06 09:00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당하는 것이다. 민주정체는 무제한의 자유 탓에 욕심과 쾌락에 빠진 나라다.”“민주정은 대중의 선호가 도덕이 되는 중우정치로 변질할 우려가 농후하다. 개별 사물 너머 존재하는 ‘그 무엇’이 본모습이자 존재 이유다.”

플라톤(BC 428?~348?)은 서구 사상의 출발점으로 불린다. 수학자 겸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오늘날의 서양철학은 플라톤 사상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구성돼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 플라톤이 2500년 전 제기한 개념과 관점, 문제의식이 아직도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으며, 무수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상찬이다. 《국가론》은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주변 사람들과 ‘정의’를 주제로 나눈 대화를 10권 분량으로 엮어낸 책이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아테네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철인(哲人)이 통치하는 이상국가 ‘칼리폴리스’에 대한 구상을 설파했다.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에는 “강한 사람이 더 많이 갖는 것, 그게 정의”라는 생각이 득세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를 ‘권력 게임’이 아니라 ‘좋은 삶’이라는 주제의식으로 풀어낸 그 자체로 혁명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철인 왕’의 이상, 법치국가로 이어져
플라톤은 1권에서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당하는 것”이라고 썼다. 최근 회자되는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인용구의 원전이다. 정치 참여 독려로 들리지만, 플라톤은 오히려 대중민주주의를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정치 형태를 좋은 순으로 최선자정체(最善者政體), 명예지상정체, 과두정체, 민주정체, 참주정체의 5단계로 구분했다. 이상적 모델인 최선자정체에서는 ‘철인’이나 여러 명의 현자가 통치자다. 첫 번째 쇠퇴 단계인 명예지상정체에선 승리와 명예에 대한 욕망이 서로 충돌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부자 중심의 과두정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이 민주정체다. 플라톤이 본 민주정체는 “부(富)를 향한 투쟁이 극한으로 전개되고, 무제한의 자유 탓에 욕심과 쾌락에 빠진 나라”다. 민주정은 독재자가 지배하는 가장 사악한 참주정으로 귀결되고 만다.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혹평을 ‘민주주의 폄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타락한 아테네식 민주정에 대한 거부로 이해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아테네는 추첨으로 통치자를 결정했다. 모두 신에게서 같은 재능을 부여받았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민주정은 대중의 선호가 도덕이 되는 중우정치로 변질할 위험이 농후하다”는 게 플라톤의 요지다. 그가 시종일관 ‘철인’ 또는 ‘철학자 왕’의 통치를 주장한 배경이기도 하다. 말년에 쓴 《법률》에선 “철인 왕의 계속적 출현을 기대할 수 없다면 법의 지배를 통해서라도 최선의 정체를 실현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한 발 물러섰다. 결국 철인 왕 구상은 법치를 지향하는 현대의 민주정과 맥이 닿는다고 볼 수 있다. 철인은 출신 성분과 무관하다. 30여 년의 학문·실무 테스트를 거친 50세 전후 능력자들이 선발된다.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선거로 뽑히는 현대의 민주제도와 결과적으로 비슷한 측면이 있다.

오늘날의 눈높이로 읽어도 《국가론》은 꽤나 급진적이다. ‘국가의 봉사자’인 통치자 계급에는 재산 보유 등 사익 추구 금지를 주문했다. “처·자식 공유로 가족제도를 해체하고, 아이들은 열 살 무렵부터 국가가 맡아 키우자”고도 했다. 누구의 아들, 딸인지 구분이 불가능해져 세습이 원천봉쇄된다. 철저한 능력 중심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라지만 분명 도발적 발상이다.

문제적 구상도 수두룩하다. “가족 해체 후 잠자리 상대는 제비뽑기로 결정하자”고 했다. 더 좋은 이상국가를 위해 필요하다며 우생학적 방법론까지 내놨다. “제비뽑기를 조작해 우수 남녀 간 성교 횟수를 늘리고, 열등 남녀 간 성교는 감축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시대를 앞서간 혁명적 생각의 ‘샘’
과격함은 적잖은 반대를 불렀다. 칼 포퍼는 목적론적 세계관에 빠진 ‘전체주의 철학의 효시’라며 플라톤을 헤겔, 마르크스와 함께 ‘열린 사회의 적’이라고 비판했다.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국가론》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론을 공격했다. 플라톤은 7권에서 ‘철인 왕은 어떤 원리에 기초해 지배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며 이데아론을 펼친다. ‘동굴의 비유’를 들어 “개별 사물 너머 존재하는 ‘그 무엇’이 본모습이자 존재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데아로 명명한 그 세계만이 진정한 세계이며, 보이는 현상은 동굴 안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했다. “철인은 동굴 밖으로 나가 진정한 원인이자 ‘선의 이데아’인 태양을 본 사람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원인을 이데아로 돌린다면 모든 현실을 부정해야 하는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다”고 정면 반박했다. ‘본질은 볼 수 없고, 사람은 나약하다’는 이데아적 세계관은 이후로도 이성을 긍정하는 후학들의 무수한 도전을 받았다.

여러 비판에 아성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사유를 확장시킨 플라톤의 논변은 늘 재해석되고 있다. 사상적 지위도 굳건하다. 문명을 진보시키는 자양분이 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기대가 여전한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발전은 지적 성장과 비례한다”는 그의 도덕철학 역시 서양 도덕체계의 근간에 자리하고 있다. 시대를 앞선 통찰로 가득한 《국가론》은 지금도 ‘마르지 않는 샘’이다.

백광엽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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