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지금의 부여)라는 항구도시로 천도하면서 해양 활동망을 더 튼튼히 구축했고, 왜국에 진출했다. 오사카부 모즈에 있는 오스카(大塚)에선 300개의 철검이 출토됐다. 이곳에는 지금도 구다라촌(백제촌)과 구다라강(백제천)이 있는데 과거에는 와니(王仁)씨, 후네(船)씨, 쓰(津)씨, 후지이(葛井)씨 등 백제계 씨족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그리고 6세기 중반에 이르면 친백제계인 소가(蘇我)씨가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에서 신흥세력으로 떠올랐다. 쇼오토쿠 태자가 실권을 장악해 백제의 영향력은 더 강력해졌다. <일본서기>에는 577년 백제왕이 경론 몇 권, 율사, 선사, 비구니, 주금사, 조불공, 조사공 6명과 함께 불상을 보내왔다고 기록돼 있다.
웅진은 금강의 하항도시지만 해양으로 진출하는 데는 다소 불편했다. 천도한 사비는 강을 끼고 있으면서 해양과 가깝게 연결되는 일종의 ‘강해도시’였다. 20세기 초까지도 큰 배들이 정박하는 큰 나루(구드래 나루)였다. 필자가 1979년 뗏목으로 금강을 탐사할 때도 부여까지 밀물의 영향이 미쳤다.
항해술과 조선술도 발달했다. 백제 선박들은 고구려의 해상권 통제와 북위의 견제 때문에 난도가 높은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즉 금강 하구와 영산강 하구 등을 출항해 황해 남부를 횡단하거나, 황해 중부를 횡단하다가 북풍을 이용해 양쯔강 하구로 진입했다. 비록 구체적인 자료나 실물 증거가 빈약하지만 우수한 원양용 선박을 보유했음이 분명하다. 다행히 북위군과 싸울 때 ‘방(舫)’이라는 큰 배를 동원해 승리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 무령왕 시대에 교류한 양나라는 2만 척의 ‘대선’을 보유했고, 페르시아까지 원양무역을 했으므로 그런 선진 조선술을 수용했다고 판단된다.
전장 46m인 이 고분에서는 청동거울, 갑옷 등 92종의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금동관, 금동관모, 금동신발 등은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공주 무령왕릉이나 익산 입점리 고분, 나주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것들과 동일하거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 85㎝의 큰 칼에는 백제왕이 신속(복속)의 표시로 준 위세품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북한 학자 김석형 주장)
멸망 위기에 처했고 내부 분열도 심각했던 백제는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을 했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농업과 함께 해양을, 국내 안정과 함께 과감한 해외 진출을 병행하는 정책을 택했다. 이를 위해 해양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해양을 최대한 이용해 분단된 중국과는 외교 협력과 무역, 문화 교류를 했고 일본열도에는 정치적으로 진출해 국가를 발전시키고 위상을 높이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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