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장벽 안'에서 문명의 꽃이 화려하게 피었다

입력 2020-11-12 17:48   수정 2021-02-10 00:03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장벽보다 더 문명 건설에 공헌한 발명품은 없었다.”

미국 고대사학자 데이비드 프라이 이스턴코네티컷 주립대 교수는 신간 《장벽의 문명사》에서 이같이 단언한다. “벽을 쌓아 올리고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이 문명을 만든 주인공”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4000여 년 전 세워진 고대 시리아의 장벽에서 출발해 메소포타미아와 그리스, 중국, 로마, 몽골, 아프가니스탄, 미국 미시시피강 하류, 중앙아메리카를 거쳐 독일 베를린장벽과 미국~멕시코 국경까지 지적 탐험을 펼친다.

저자가 장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벽의 극단적 양면성 때문이다. 장벽은 안전을 보장하는 폐쇄성과 교류를 촉진하는 개방성을 모두 지녔다. 그는 “통념적으로 다리는 연결의 상징, 장벽은 단절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며 “하지만 실제로는 장벽이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하고 개방과 평화를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장벽이 없었다면 중국의 학자도, 바빌로니아의 수학자도, 그리스의 철학자도 없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문명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장벽만큼 뛰어나게 역할을 수행한 촉진제는 없었다. 최초의 문명을 건설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도시를 토벽으로 둘러쌌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진·한 시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만리장성을 계속 쌓았다. 로마시대 철학자 아리스티데스는 로마 제국의 장벽을 “부서지지도 허물어지지도 않는다”고 찬양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은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손에 함락되기 전까지 1000년 가까이 제국의 도시들을 지켰다.

‘장벽 안쪽의 인간’은 벽 안에 웅크린 채 불안과 안도감을 오가면서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문명을 발전시켰다.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자아도취와 군사주의였다. 자아도취를 선택한 경우 과학과 수학, 연극과 미술 등 다채로운 문화를 생산하며 즐겼다. 군사주의는 곧 다른 장벽을 향한 적극적 침략으로 이어졌다.

역사에서 ‘난공불락의 신화’란 없었다는 점도 지적한다. 만주족은 중국을 정복했지만 만리장성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오삼계를 비롯해 만리장성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군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청나라는 만리장성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는 독일과 맞닿은 국경지대에 마지노선을 건설했지만, 독일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이 선을 우회해 프랑스를 침공했다. 이제 마지노선은 관용어 속에서만 살아남았다. 스스로 갇혔던 문명은 새로운 문명과 부딪치며 또 다른 가치와 질서를 만들어냈다.

냉전의 상징이었던 독일 베를린 장벽에 대한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베를린은 동·서로 갈라졌다. 동독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서베를린으로 계속 탈출하자 동독 정부는 1961년 서베를린을 철조망과 콘크리트로 만든 장벽으로 에워쌌다. 저자는 “베를린 장벽은 동독 정부에 해롭기만 했던, 역사상 가장 쓸모없는 벽이었다”고 꼬집는다. 장벽을 건설함으로써 동독 정부는 체제의 우월성을 두고 벌인 경쟁에서 패했음을 시인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꺼낸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뒤 쇠락하는 듯했던 장벽이 21세기 들어 ‘르네상스’를 맞았다고 말한다. 미국과 중남미, 유럽, 인도, 중동 등지에서 새로운 장벽이 솟아나고 있다. 보이고 만져지는 장벽뿐만 아니라 무형의 장벽이 높아졌다. 난민의 대량 유입, 테러, 전염병, 마약 등에 대한 두려움이 장벽 건설을 세계적 현상으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미국과 멕시코 사이 국경은 중국의 만리장성과 매우 닮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만리장성이 진시황만의 작품이 아니듯, 미국~멕시코 국경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홀로 세운 장벽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 이전에 만들어진 장벽이 국경 곳곳에 있다. 두 장벽 모두 외부인을 경계하고, 외부인이 들어와 장벽 안의 사회를 무너뜨릴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만들어냈다.

세계 각국은 지금 새로운 고립주의로 무장한 채 각자도생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저자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장벽과 장벽 사이에서 독자에게 묻는다.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롯이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둔다. “고립될 것인가, 고립시킬 것인가.”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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