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무척 많은 사람이 정보를 퍼뜨리는 것과 여러 이유로 주변에 친구가 별로 없는 사람이 정보를 퍼뜨리는 것은, 소문의 초기에 아주 다르게 나타난다. 친구가 적거나 소통을 적게 하는 사람으로부터 소문이 시작됐지만, 어느 시점에 친구가 많은 사람에게 소문이 도달해야만 그때부터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개개 입자의 거동과 이들이 맺는 관계망,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전체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복잡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각 요소의 개별 행동뿐 아니라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구성돼 있는가, 어떻게 짜여 있는가 하는 ‘짜임’이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상호작용하는 여러 구성원 사이를 다루는 복잡계는 물질, 생명,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비교적) 새로운 사고체계다. 두뇌, 사회그물망(social network), 생명 군락, 단백질 상호작용, 도시교통 등은 복잡계의 훌륭한 사례다.
단순한 정보를 처리하는 각 뉴런이 있고, 이들이 일정한 그물(관계망)을 이루도록 해 복잡한 정보를 나눠 처리한다. 개별 뉴런들이 처리한 결과가 모여서 지능을 이룬다. 앞서 말한 ‘소문’이 처리되는 방식과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정보를 처리하는 개별 입자는 하나의 뉴런과 같다. 이들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따라서 정보가 처리되는 과정이 다르다. 소문이 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결이 많은 뉴런에 정보가 비로소 당도하면 이 정보는 현격하게 빨리 전달된다. 다만 그런 뉴런에 정보가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성적이 바로 오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보나 소문이 처리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겠다. 공부해서 내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가 전체 뉴런과 신경 그물망에 아직 덜 소문났기 때문이다.
지금 인공지능은 특정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유용하다. 정답이 없는 데이터에서 얼굴을 인식하고 게임을 하는 등(비지도학습) 상당히 성공적이다. 그 근간에는 복잡성으로 대표되는, 많은 수의 개개 요소가 짜여져 생겨나는 떠오름이 있다. 그러나 아직도 현실의 수많은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개별 인공지능을 구성요소로 해 더 큰 복잡계를 구성해 볼 수도 있겠다. 마치 집단지성을 이루는 것과 비슷한 형태로 말이다.
복잡계를 연구하는 진정한 학자라면 이런 인공지능의 도약 과정에서 변하게 될 사회 모습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함은 당연하다. 2016년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백악관에서는 인공지능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그로 인해 직장을 잃게 될 사람들을 교육해야 한다고도 일갈했다. 사회변화 역시 새로운 복잡계인 셈이다.
인공지능은 이렇게 복잡계로서 이해될 수 있다. 적절한 자율성을 지닌 개별 요소들이 서로의 참여를 통해 전체를 이뤘을 때를 이해하려는 것이 복잡계의 시각이다. 인공지능에서도 복잡계와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참인 것이 전체적으로는 참이 아니기도 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詩) ‘순수와 전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의 무한을 붙잡으라/ 찰나 속의 영원을” 복잡성은, 그리고 지능을 이해하는 과학적인 여정은 창의성을 이루는 근본에 다가서는 일이 아닐까 싶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