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사진)은 작년 10월 그룹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 키워드를 제시했다. ‘파이낸셜 스토리’였다. ‘딥 체인지’(2018년), ‘디자인 사고’(2019년)에 이은 새 메시지였다. 이후 각 계열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셰일가스 광구부터 자회사와 주식은 물론 야구단까지 줄줄이 팔기 시작했다. SK가 파이낸셜 스토리를 쓰기 위해 손댄 첫 작업은 자산의 효율적 활용이었다. 그룹 내부에선 최 회장의 메시지를 “측정하고, 유동화해서 신사업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SK는 야구단 운영에 연 300억원 안팎을 썼다. 하지만 그 성과를 정확히 측정하진 못했다.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는 최 회장 지론과 맞지 않았다. SK가 1조원을 은행서 빌리면 이자는 연 3~4% 수준이다. 야구단 연간 운영 비용과 엇비슷하다. 야구단을 팔면 매각액(1000억원) 이외에 추가로 1조원의 사업 기회를 갖는 셈이다.
광구 매각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된다. SK이노베이션은 이달 북미 셰일가스 광구를 팔았다. 2019년엔 페루 석유 광구도 약 1조2500억원에 정리했다. 광구 개발은 때론 ‘대박’을 치지만, 안정성은 떨어진다. 사업성을 ‘추정’할 순 있지만 정확한 ‘산정’은 어렵다. 측정이 잘 안 되는 사업에 SK이노베이션이 계속 베팅하긴 힘들었을 것으로 업계에선 분석했다.
SK는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도 동원했다. 그룹의 상징인 서울 서린빌딩과 SK 주유소 100여 곳이 기초자산이다. SK리츠를 통해 일반 투자자를 상대로 4000억~5000억원을 공모할 예정이다. 소유권은 리츠에 넘어가지만 리츠 지분 과반을 확보, 사실상 소유도 하게 된다.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분리막 자회사 SKIET의 연내 상장도 추진 중이다. 자산 매각과 유동화를 통해 확보한 현금은 ‘신사업’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SKC가 코오롱과 합작한 PI첨단소재를 매각한 돈으로 2차전지 핵심 소재인 동박 사업에 진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들 두 사업은 기존 정유 사업에서 파생된 것이다. 원유를 수입해 정제한 뒤 석유화학제품을 만드는 수직 계열화로 묶여 있어 시너지 효과가 크다. 하지만 SK이노베이션은 반대로 갔다. 업계에서 “SK의 정유 사업 의지가 꺾인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잇달아 광구까지 매각하자 이런 분석에 더 힘이 실렸다. ‘광구-정유-석유화학’으로 이어지는 수직 계열화 구조를 깨뜨려 스스로 사업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친환경은 최 회장의 ESG 경영에서 핵심이다. 그는 작년 10월 나무를 베어 비싸게 파는 벌목회사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며 “기업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가치를 만들어 내야 지속 가능하다”고 했다. SK그룹에 ‘벌목회사’는 화석연료 사업부가 꼽힌다. SK그룹 관계자는 “최 회장이 요구한 파이낸셜 스토리의 키워드는 고객”이라며 “시장에서 신뢰받는, 매력 있는 기업이 돼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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