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경제 세계사] 반달족은 어쩌다 야만의 대명사가 됐을까

입력 2021-04-05 09:00  


8만 명이 넘는 북방 야만족 집단이 430년 지브롤터해협을 건넜다. 이 야만족의 정예병들이 북아프리카의 히포 레기우스로 진격했다. 히포는 북아프리카 최대 도시인 카르타고와 로마식 가도가 연결된 상업·군사 요충지였다. 그들은 히포를 지키던 로마 군대와 14개월간 공방전 끝에 결국 함락시켰다. 히포를 점령한 야만족이 바로 반달족이다. 게르만족 일파인 반달족은 본래 2~3세기께 북유럽에서 남하해 폴란드 남쪽 도나우강 유역에 살았는데, 5세기 들어 훈족의 압박과 기후 악화로 인한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부족 전체가 남쪽으로 이동했다. 반달족은 ‘교활하지만 탁월한 왕’으로 평가받는 가이세리크의 지휘 아래 히스파니아(스페인)로 들어갔으나, 먼저 정착한 서고트족에 밀려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것이다.

반달족은 5년간 마우레타니아(모로코)와 누미디아(알제리)를 평정하고 최대 도시 카르타고까지 점령한 뒤 반달왕국을 세웠다. 지브롤터해협을 건넌 지 10년 만이다. 그들은 카르타고를 거점으로 시칠리아섬, 샤르데냐섬을 수시로 약탈하고 이탈리아 본토까지 넘봤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서로마제국이 북방 훈족과 게르만족을 방어하는 데 전념하느라 남쪽을 대비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이세리크의 반달족은 455년 수도 로마의 외항인 오스티아에 상륙했다. 이에 테베레강을 거슬러 로마에 입성했다. 겁에 질린 군중이 무기력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를 살해하자, 교황 레오1세가 가이세리크와 협상해 성문을 열었다. 반달족 병사들은 보름 동안 로마를 철저히 약탈해갔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반달족의 로마 약탈을 ‘로마 겁탈’이라고 기술했다.
오해에서 비롯된 반달리즘과 고딕
로마를 약탈했다는 이유로 반달족은 훗날 ‘야만의 대명사’가 됐다. 반달족은 로마의 금은보화는 물론 청동상·조각상과 신전 지붕의 금박을 떼어냈고, 조각이 새겨진 난간과 문짝까지 탈탈 털어갔다. 여기서 유래한 반달리즘은 문화·예술을 훼손하거나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통용된다. 이 말이 처음 쓰인 것은 프랑스혁명이 한창이던 1794년께 혁명 군중이 가톨릭 교회 건물과 예술품을 파괴하고 약탈했을 때다. 당시 프랑스 주교 앙리 그레구아르가 반달족의 로마 약탈에 비유해 반달리즘이라고 명명한 데서 유래했다.

하지만 반달족으로서는 억울한 작명이다. 그들은 교황과의 약속에 따라 교회를 파괴하지 않았고, 저항하지 않는 시민은 해치지도 않았다. 진작부터 로마 문명의 우수성을 알고 동경해왔던 터라 문명 파괴보다는 예술품 반출에 주력했다. 이미 제국의 위용을 잃은 서로마의 문화와 예술을 진짜 파괴한 것은 제국 말기의 노예와 빈민이었다. 이어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는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 국왕과 동맹을 맺은 데 대한 보복으로 병사 2만 명을 보내 로마 시내를 부수고 불태우는 로마 약탈을 자행했다. 후대 예술가와 로마 주민도 빼놓을 수 없다. 예술가들은 르네상스 시기에 고대 양식을 재현하겠다며 옛 건축물의 기둥을 뽑아댔고, 주민들은 콜로세움의 돌을 빼내 집 짓는 데 썼다. 예술품을 외국으로 팔아먹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반달왕국은 533년 동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파견한 명장 벨리사리우스의 군대는 2주 만에 카르타고를 함락시키고 반달족의 흔적을 없앴다. 이후 반달족은 다민족 제국인 동로마제국의 일원으로 흡수됐다. 반달리즘에 얽힌 오해에서 비롯된 사례가 고딕이다. 뾰족한 첨탑과 아치 등이 특징인 고딕의 본래 의미는 ‘고트족의’ ‘고트풍의’이지만 고트족과는 관련이 없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중세 건축과 미술을 촌스럽다고 여겼다. 중세 예술 양식을 경멸적으로 부를 때 당시에 반달족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 고트족을 갖다 붙인 것이다.
스핑크스의 코가 깨진 이유
이집트 기자 지역의 3대 피라미드 앞에 사람 얼굴과 사자 몸통을 한 스핑크스 석상이 있다. 스핑크스는 피라미드처럼 돌을 층층이 쌓은 게 아니다. 하나의 석회암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스핑크스는 코를 포함한 얼굴 부위가 심하게 파괴됐다. 그 연유에 대해서는 18세기 말 나폴레옹 군대의 포격설, 17세기 오스만제국의 포격설, 중세 이슬람교도 또는 기독교도의 파괴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와 달리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종교의 광신도들이 스핑크스를 파괴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집트의 룩소르, 아부심벨 등의 석상을 보면 대부분 얼굴이 파괴됐거나 머리가 없다. 이슬람권은 기독교도를 파괴자로 지목하고, 기독교권은 이슬람교도를 의심한다.

인류의 반달리즘은 그 기원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민족, 타종교를 정복했을 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문명 파괴와 약탈이 일어난 것을 보면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이 아닌가 싶다. 역사에 기록된 반달리즘의 최초 사례는 BC 356년 에페소스(터키 지역)에 있는 아라테미시스신전으로, 헤로스타루투스란 방화범에 의해 불탄 사건이다.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도 반달리즘으로 피해를 봤다. 17세기에 그리스를 침공한 오스만제국 군대가 파르테논신전을 화약고로 썼다. 반격에 나선 베네치아 연합군이 이곳에 대포를 쏘아 신전 지붕이 날아갔다.
현대의 일상 속 반달리즘
일상 속에서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반달리즘은 자주 일어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망치로 공격받았고,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일본에서 전시될 때는 페인트 세례를 받을 뻔한 적도 있다. 오늘날 반달리즘이란 용어는 문화유산, 예술품에 대한 파괴뿐 아니라 공공시설, 자연을 훼손하는 낙서, 난개발까지 포함되는 개념으로 통용된다. 파괴는 하루면 충분하지만 이를 되돌리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수 있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
① 많은 국가들이 이전 시대의 문화재를 보존하려고 애쓰는 반면 이슬람 무장 세력인 탈레반이 1996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면서 6세기 불상을 파괴하는 등 서로 상반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뭘까.

② 세계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기 위해 영국 대영박물관이 파르테논신전 조각상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이 조선 외규장각 고서를 보관하는 등 다른 나라 문화재를 합법·불법 가리지 않고 갖고 와도 될까.

③ 2008년 숭례문이 전소되고 기차역 등 공공시설물에 대한 낙서가 끊이지 않는 등 계속되는 반달리즘 행태를 근절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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