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속에서 진 '햄릿의 연인'…걸작은 몰입에서 탄생했다

입력 2021-05-20 17:43   수정 2021-05-21 02:52

미국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창의적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일을 즐기고 그 순간에 몰입했다. 마치 물이 흘러가듯 몰입 상태(flow)에서 최고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일에 집중해 시간의 흐름이나 장소,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잊어버리는 몰입 상태에서 창의성이 증진된다는 칙센트미하이의 ‘플로우 이론’은 명화의 탄생 과정에도 적용된다.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는 11세에 미술 명문 왕립예술아카데미에 최연소 입학한 신기록을 남긴 천재였다. 그가 22세에 그린 걸작 ‘오필리아’는 몰입이 천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영재성이 뛰어날수록 몰입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1852년 왕립예술아카데미에서 선보인 이 작품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의 죽음을 회화로 옮긴 것이다. 오필리아는 연인 햄릿의 칼에 아버지 폴로니어스가 살해되자 그 충격으로 미쳐서 물에 빠져 죽은 비운의 여주인공이다.

‘햄릿’ 4막7장에 햄릿의 어머니이자 덴마크 왕비인 거트루드가 오필리아의 오빠 레어티스에게 비극적인 최후를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애가 화관을 나뭇가지에 걸려고 버드나무에 올라갔는데 그만 가지가 부러지면서 시냇물에 빠지고 만 거야. 그 애는 옷자락이 활짝 펴져서 마치 인어처럼 물 위에 둥실 떠 있는 동안 옛 찬송가를 불렀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옷이 물에 잠겨 무거워지자 가엾은 그 애는 진흙 사이로 끌려 들어가고 아름다운 노래도 끊어지고 말았어.’

가혹한 운명에 희생당한 오필리아의 죽음은 많은 화가에게 영감이 돼 다양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밀레이는 오필리아를 주제로 한 다른 작품과 차별화된 강렬한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해 혁신적 창작 방식을 도입했다. 인물과 배경을 동시에 그리지 않고, 배경이 되는 풍경을 먼저 그리고 인물을 나중에 묘사한 다음 결합했다. 전통 회화에서 풍경은 인물의 보조 역할에 그쳤지만 밀레이에게는 둘 다 중요했다. 자연 풍경이 오필리아의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특히 꽃을 비롯한 식물 표현은 인물 묘사만큼이나 중요했다. 사랑의 기쁨과 고통, 죽음, 순수함을 상징하는 꽃말을 통해 오필리아의 심리 상태와 감정을 대신 전하기 위해서였다.

밀레이는 영국 남부 서리 근교 이웰의 호그스밀강 근처에서 야생화 화관을 쓴 오필리아가 익사하는 장면과 일치하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는 1851년 7월부터 5개월 동안 파리 떼와 모기, 악천후에 시달리면서도 야생화가 자라서 꽃을 피우는 과정을 현장에서 관찰하며 실물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일에 집중했다.

몰입은 놀라운 성과로 나타났다. 수십 종의 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작품인 동시에 식물학 자료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밀레이의 아들 존은 전기(傳記)에서 학생들을 시골로 데려갈 수 없었던 식물학 교수가 이 그림을 수업 교재로 활용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밀레이는 5개월간 풍경 작업을 끝내고 런던 작업실로 돌아와 겨울 동안 인물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오필리아의 모델로 19세의 엘리자베스 시달이 뽑혔다. 밀레이는 익사 장면을 실감나게 재현하기 위해 시달에게 중고 상점에서 4파운드에 구입한 은실 자수 드레스를 입고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두 팔을 벌린 기도 자세로 눕도록 설득했다. 추운 겨울 4개월 동안 이어진 작업 과정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날 물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욕조 아래 설치한 오일 램프가 고장났는데도 일에 몰두한 밀레이는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찬물에 방치된 시달이 폐렴에 걸리자 분노한 시달의 아버지는 밀레이에게 치료비를 주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압박했다. 밀레이에게 받아낸 돈으로 시달은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이런 일화들은 밀레이가 몰입형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밀레이가 창조한 ‘오필리아’ 이미지는 문학적 주제의 상징성과 자연세계의 사실적 묘사가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으며 회화, 사진,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영국 로런스 올리비에 감독·주연의 영화 ‘햄릿’(1948), 덴마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2011), 세계적인 패션 사진가 듀오 머트&마커스의 작업에 영감을 줬다. 또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1906)에 인용돼 일본에 오필리아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명옥 < 사비나미술관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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