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대모' 따스한 치유의 손길을 내밀다

입력 2021-12-19 16:37   수정 2021-12-20 08:56


파블로 피카소의 뒤틀린 이목구비, 잭슨 폴록의 흩뿌린 물감, 구사마 야요이의 물방울무늬….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들의 이름 옆에는 대개 작품의 명확한 특징에 대한 설명이 따라붙는다. 프랑스 태생의 미국 작가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는 예외다. 그의 작품 특징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장르부터 조각과 드로잉, 설치, 바느질 작업 등으로 종잡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현대미술의 거장 대우를 받는다.

이력도 특이하다. 부르주아는 40대가 다 돼서야 미술가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60대 때 주류 미술계의 인정을 받기 시작해 70세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82년에는 여성 작가 최초로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는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주류 미술사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성과 기존 미술의 형태적 한계를 초월한 독창적 표현 방식이 오늘날 그의 위상을 이룩했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그가 ‘현대미술의 대모’로 불리며 많은 예술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평론가들이 지목하는 건 ‘따스함’이다. 평생에 걸쳐 자신을 괴롭힌 트라우마와 부정적인 감정을 예술을 통해 극복하고 정화한 작가의 에너지가 작품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의 유년기는 불행했다. 아버지는 그가 친언니처럼 의지했던 가정교사와 파렴치한 불륜을 저질렀고 벌이도 변변찮았다. 어머니는 혼자 가정을 건사하다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언니는 성적으로 문란했고, 남동생은 가학적인 성향이 있었다. 탈출구로 예술을 택했지만 청·장년기도 행복하지 않았다. 환갑이 되도록 작품 한 점 제대로 팔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고통스러운 경험과 부정적인 감정을 독창적인 예술로 승화시켰다.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거대한 청동 거미 조각인 ‘마망(엄마)’ 연작이 대표적이다. 흉측해 보이는 거미의 모습은 사실 알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부풀려 상대를 겁주는 자세를 형상화한 것이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등 세계적인 명소에 총 여섯 점이 설치돼 있는데, 국내에도 한 점이 있다.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앞뜰에 있다가 최근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앞 호수 주변에 설치된 작품이다.

부르주아가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긴 하지만 그의 작품은 성별을 떠나 보편적인 감동을 준다. 그는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여성 미술이라는 부조리한 개념을 믿지 않는다”며 “그저 고통과 고독, 상처와 증오, 연민 등 내가 경험한 감정의 집합을 표현했을 뿐”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여러 미술사조와 장르, 화풍에 얽매이지 않는 것처럼 특정 사상에도 얽매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서울 국제갤러리 1, 3관에서 열리고 있는 부르주아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는 말년 작품을 중심으로 작가의 예술 세계를 전반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전시다. 작가의 말년 판화 작품 46점과 조각 8점을 펼쳤다.

이번 전시 제목이자 전시작의 제목이기도 한 ‘유칼립투스의 향기’는 부르주아 후기 작품의 주요 주제인 자연의 순환과 추억, 치유를 상징하는 소재다. 1920년대 후반 부르주아는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며 유칼립투스를 약용으로 자주 사용하곤 했다. 생전 작업실을 환기시키면서 정화를 위해 그가 태운 것도 유칼립투스였다. 윤혜정 국제갤러리 이사는 “부르주아는 유칼립투스를 통해 미술의 치유적 기능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의 주축은 ‘내면으로 #4 Turning Inwards Set #4’ 연작이다. 부르주아가 생애 마지막 10여 년간 만들어낸 종이 작품들로, 낙엽 및 식물을 연상시키는 상승 곡선과 씨앗 모양의 성장 모습 등을 다루고 있다. 꽃을 주제로 한 드로잉들도 선보이는데 이는 용서를 상징한다. 부르주아는 생전 “꽃은 아버지의 부정을 용서하고 어머니의 무심을 용서한다”고 말한 바 있다. 조형 작품 ‘Mirror’(1998), ‘POIDS’(1993) 등도 함께 전시장에 나와 있다.

국제갤러리 2관에서 열리는 단색화가 권영우(1926~2013)의 개인전도 주목할 만한 전시다. 권영우는 한국적인 재료를 현대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조형 언어를 구축한 작가다. 이번 전시에는 1989년 그가 파리에서 귀국한 뒤 작업한 채색 작품 11점, 2000년대 이후 패널 위에 한지를 겹겹이 붙여 만든 작품 7점을 함께 걸었다. 이 중 채색 그림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일반 관객에게 공개된다. 두 전시 모두 1월 30일까지 열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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